인수는 모텔 현관을 나서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모텔 앞 도로도, 공터 오동나무도, 길 건너 찻집 지붕도 순백색이었다.
세상의 세밀한 부분이 지워지고 저마다 자태를 뽐내던 사물들이 수줍게 돌아서 있었다.
멀리 보이던 산도 흰 모자를 쓰고 가까이 다가와 있어 원근감이 지워진 풍경 속에서
세상의 낯빛이 한결 순해 보였다.
" 영동 지방은 원래 초봄에 눈이 많이 와요. 4월에도 눈이 내려 싹튼 감자가 다시 눈에 묻히는
일도 있는데.........."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인수를 보며 눈을 치우던 주인사내가 말을 건넸다. 3월 말이어서,
전날까지도 바람에 부드러운 봄기운이 섞여 있어 하루하루 봄을 기대하고 있던 마음에 약간의
낙담이 깃들기는 했다.
" 이런 폭설은 피해가 커서, 영동 지방에서 시장이나 도지사 하려면 눈을 잘 치우면 된다는
말도 있다니까요."
주인사내는 허리를 펴며 헛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미 모텔에서 병원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눈을 깨끗이 치워놓고 이번에는 공원 방향으로 길을 내고 있었다. 적설량이 20센티미터는 되어
보여 하룻밤에 내렸다고 믿기지 않았다.
인수는 주인사내와 인사를 나눈 후 그가 내어놓은 좁은 길을 따라 병원으로 갔다. 큰길 쪽에서는
거대한 삽 같은 기구를 범퍼 앞에 단 제설 차량이 눈을 밀며 지나가고, 바퀴에 체인을 감은
택시들이 익숙하게 눈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 수진아, 눈이 왔어. 너도 봤니?'
인수는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수진의 낯빛을 살피며 속엣말로 말을 건넸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인수는 어쩐지 수진이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인수는 수진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을 잡아보고, 미미하게 들렸다 내려졌다 하는 가슴도
한동안 지켜보았다.
수진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지 일주일쯤 되었다. 의사는 수진의 뇌압이 안정되었고
폐 수술한 자리도 잘 아물어 모든 상황이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원한다면 지금 서울로 옮겨도
괜찮다고 했다. 인수는 아직 그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로 가고 싶은지,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시골의 맑은 공기가 수진의 건강에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수진을 핑계 삼아 이곳에서 좀 쉬고 싶기도 했다.
서울로 옮겼을 때 문병 올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할 여력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생을 방기하듯,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그냥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인수는 푸른빛이 돌 정도로 창백한 수진의 이마를 바라보다가 침대 밑의 소변통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통의 내용물을 변기에 붓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노란 액체를 잠시 바라보았다.
노란빛은 맑고 투명하여 빛이 나는 듯했다.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수진의 몸이 생명 활동을
계속한다는 증거는 투명한 주사액을 받아들여 노란색으로 바꾸어 내보내는 그 사실뿐이었다.
그렇잖아도 노란색 같던 수진이었다. 인수는 노란 액체를 변기에 붓고 소변통을 씻은 후
침대 아래에 가져다놓았다.
그런 다음 실내 공기를 바꾸기 위해 창을 조금만 열었다.
찬바람이 수진에게 직접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커튼은 열지 않았다. 바람은 커튼에 닿아
한풀 꺾인 다음 수진의 병상 반대쪽으로 불어갔다.
인수는 창가에 서서 눈들이 반사해 올리는 흰빛을 조금 더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흰빛이 부담스러웠다.
색은 섞을수록 검어지지만 빛은 섞을수록 흰빛을 띠었다. 인수에게 흰빛은 백지처럼 빈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빛들이 가득 차 있는, 무거운 색이었다. 통합과 무한의 색, 그 흰빛 앞에서 인수는 가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흰빛의 도로 위로 천천히 지나가는 붉은빛이 시선을 끌었다. 시선으로 붉은빛을 따라가던 인수는
그것이 서영의 붉은 코트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가슴이 조금,
미미하게 좌우로 한 번 움찔거렸다. 그녀는 눈길을 걸어 강둑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고개 숙여 발밑을 살피다가 고개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의 집들이며
나무를 훑어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땅끝마을에 다녀온 후 인수는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끝 간 데 없이 날카로워지기만 하던 신경이 가라앉고, 예리하게 벼려지기만 하던 분노 같은
감정이 무뎌졌다. 미미한 변화는 그녀에게서도 보이는 듯했다. 그전까지는 딱딱한 가면 같던 얼굴이
그날 이후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병원 복도나 모텔 앞에서 마주칠 때면 편안한 낯빛으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며칠 후 인수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찾아와 " 수사 결과가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라고 말을 건넸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운전은 제 남편이 했다고 하네요. 보상금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인수는 그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가해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피해자가 되어, 의식조차 없는 그들이 보상금을 주고받아야 하다니.
"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죠."
인수는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음을 띠었다면 아마도 그 상황의
아이러니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 그렇죠?"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눈썹을 약간 들어올리면서, 입꼬리도 같은
방향으로 올리면서, 그러나 입은 다문 채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인수의 생각에
1백 퍼센트 동의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그때 인수는 여자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화사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허공을 건너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인수는 강둑의 붉은 코트가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바라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물수건을 만들어왔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하루 한 차례씩 면회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일반 병실로 옮기자 종일
수진 옆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인수가 할 일도 많아졌다. 소변통을 비우는 일 말고도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한두시간 간격으로 누운 자세를 바꾸어주어야 했다.
24시간 돌봐주는 간병인을 두기는 했으나 인수는 낮 시간 동안은 대체로 수진의 병실에 머무르며
간병인과 교대했다.
인수는 수진의 환자복 상의를 벗긴 후 등과 옆구리부터 닦기 시작했다. 얼굴보다 더 흰 속살과,
그곳에 난 솜털과 땀구멍까지가 환하게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동시에 익숙한 체취가 맡아졌다.
체취를 맡자 마음보다 몸이 고통을 느꼈다. 너한테서는 과자 냄새가 나. 그렇게 말하며 수진의
가슴과 겨드랑이 근처로 파고들던 행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수진의 몸은 추억과 고통이고, 환희와 절망이었다.
인수는 손길을 멈춘 채 가만히 있다가 결국 그대로 담요를 덮고 말았다.
" 수진아, 왜 그랬니?"
인수는 낮은 목소리로, 입 밖에 내어 말했다. 눈을 감고 자는 듯 누워 있어도 주변 상황을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내가 새벽에 귀가하는 날들이 많아서 그랬니? 지방 공연이 잦아서 한 달에 절반밖에 집에
못 들어가서 그랬니?"
인수의 말에 대답하듯 수진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인수는 열어두었던 창을 닫고 냉장고 위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마침 외출했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돌아오는 바람에
인수는 교대하듯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면서 중환자실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서영이 남편을 면회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인수는 병원 밖으로 나가 좀전에 서영이 걷던 강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둑 위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고, 눈 위로 사람들이 디디고 지나간 발자국만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인수는 그 발자국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걸었다. 강둑 중간쯤에서 방향을 돌려 도심으로
길을 잡아 돌아오다가 분식집에 들러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다.
모텔로 돌아온 후에는 노트북 컴퓨트를 켜고 조명 설계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다. 광일이 다음
공연용 프로그램을 짰다면서 컴퓨터로 전송해주었는데 그래픽이 문제인지, 트라스 구조를
이리저리 바꾸어 보았지만 명료한 이미지가 잡히지 않았다. 사실 프로그램이나 그래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수는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손을 놓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동안 컴퓨터가 자동으로 화면 보호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컴퓨터 화면에 사진들이 뜨기 시작했다. 수진과 여행 다닐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
로마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웃는 수진의 모습, 푸켓 해변에서 어깨동무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저 사진들로부터 얼마나 먼 곳에 와 있는 걸까, 그 심리적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사진 속 추억의 미세한 부분들이 지워진 것처럼 감정도 희미해져 있었다. 내면의 많은 것들이
눈 덮인 세상처럼 모호해서 그만큼 순연해진 것도 같았다. 오래된 사랑도, 낡은 일상도.
인수는 결국 노트북 컴퓨터를 끄고 말았다. 컴퓨터를 밀어놓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가 시선을
끌었다.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그날 아침 서영의 방에서 주운 메모였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외출했었는데 저녁에
돌아와 보니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쓰레기통 속에 들어 있지
않은 물건이면 무엇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것 같았다.
인수는 그 종이를 그대로 두었다. 특별히 소중하게 간직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주의해서 버려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오면가면 그 문장과 맞딱뜨리곤 했다.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때로 그 문장을 읽을 때면 진짜로 시원한 물을 마시는 듯한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
인수는 결국 다시 모텔 방을 나왔다. 모텔 주변의 눈길을 걷다가, 자동차로 들어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었다. 마음이 한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결국 자동차에서도 내려 모텔 주차장의 눈을 집어 들고 뭉치기 시작했다. 손에 뭉쳐 쥔 눈덩이를
벽을 향해 던져보았다. 눈송이가 벽에 부딪쳐 부서져내리고 벽에 부정형의 흰 자국이 남을 때
마음이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인수는 다시 눈을 뭉쳐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탈진할 때까지 눈이나 던질 참이었다. 쓰러질 때까지, 기진맥진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눈을 던질 작정이었다.
그 시간 서영은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채널은 끝도 없이 나열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 붙이고 차분히 볼 수가 없었다. 물론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이 한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호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있었다. 허락된 시간에 면회를 해도 서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몸에 이런저런 기계 장치를 달고 있는 경호는 날이 갈수록 낯설어 보였고,
서영은 습관처럼 면회를 가서 형식적으로 경호를 바라보다가 나오곤 했다. 담당 간호사나 의사가
경호의 상태를 말해주었지만 결론은 늘 마찬가지였다. 지켜보는 중이라는 것.
경호를 면회하는 두 시간을 제외하면 서영에게는 하루 스물두 시간이 비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고, 집안일을 하거나 요리를 할 수도 없는 스물두 시간이었다.
병원 앞 삼거리를 한 길씩 걸어갔다 걸어오고, 병원 뒤 강둑을 따라 시멘트 공장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오고, 또 반대편으로 걸어 공원에 오래 머물러도 저녁이 오지 않았다. 서영의 걸음을 따라
시간이 길게, 더 길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강둑에 올라서서 보면 강 건너 단애는 볼 때마다 모양이 달랐다. 맞은편에서 보면 그냥 밋밋한
절벽이지만 강바닥까지 내려가서 올려다보면 원뿔 모양으로 보였다. 해 뜨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돌아보면 등이 둥그스름한 거북이처럼 보였고 해 지는 방향에서 보면 너무 거대해서 숨통이
막히는 암벽 덩어리일 뿐이었다.
서영은 크게 한숨을 쉰 후 텔레비전을 껐다. 문득 사방이 고요해진 그때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가 벽에 부딪치는 둔중한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되고 있었다. 어설픈
모스 부호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샌드백을 두드리며 펀칭 연습을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결국 서영은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 방문을 두드리며 " 얘기 좀 해요" 라고 말했던 사람, 약 봉지를 건네며
" 힘내세요" 라고 말했던 사람. 서영은 그 사람이 있어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경호의 사고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울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면서 끝 간데 없이 신경이
곤두서기만 할 때, 그와 함께 땅끝마을에 다녀오면서 그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가 곁에서 지켜주었기에 벌판에 퍼질러 앉아 마음껏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를 믿었기에
타인의 차 안에서 그토록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어서 말없이
공감하고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다. 잠깐씩 잠에서 깰 때면 여기가 어딘가,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내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끔씩 그가 머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곤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잠이 너무 무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깊고 긴 잠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서영은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폭발 직전까지 내면에서 들끓던
감정들이 진정되고 있었다. 마음의 변화가 속수무책이거나 불가항력이라는 사실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남자 덕분이었다.
인수는 아주 중요한 일인 듯 허리 숙여 눈을 집어 들고, 그것을 양손으로 뭉치고, 그런 다음
벽을 향해 집어던지는 일을 기계적인 동작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서영은 중요한 일거리이기라도 한 듯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허공을 향해 고개 드는 그와 그를 내려다보는
서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3층 높이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즉각 어떤 메시지가 오가고,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서영은 겉옷을 걸치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서영이 다가가자 인수는 막 뭉치고 있던 눈을 서영에게 건넸다. 서영은 묵묵히 눈 뭉치를 받아 들고
인수가 했던 것처럼 벽을 향해 던졌다. 눈은 벽에 미치지 못한 채 벽과 그들이 선 곳 중간쯤에
떨어졌다. 서영이 먼저 웃고 인수가 따라 웃었다. 서영은 인수의 웃음이 서늘해 보이고, 그 웃음
때문에 인상이 선량해 보인다고 느꼈다.
|
" 수진아....... 너 왜 그랬니?.........."
" 나......정말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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