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병실 창을 열고 커튼을 젖혔다. 부드러운 바람에도 풀 냄새가 실려오고 봄볕은
가느다란 빛의 화살들처럼 얼굴로 쏟아져내렸다.
얼마전까지 서영은 빛이란 넓적하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빛이 미세한 색깔 화살들의 결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잘 표백된 옥양목 헝겊 같던 형광등 불빛조차 미세한 빛의 가닥들이 엮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조명 오퍼레이터는 항상 조명만 생각해요."
인수의 말을 들은 후부터의 변화였다. 햇볕을 쬘 때면 빛의 화살들이 살갗에 와 닿은 감각을
일일이 가려서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몸의 감각이 그토록 예민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서영은 두 손을 교차하여 팔뚝을 쓸어내린 다음 걸레를 들고 창을 닦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창턱을 다 닦고 유리창을 닦으려다가 서영은 생각난 듯 경호를 돌아보았다. 얼굴에서 산소호흡기를
뗀 그는 예전보다 얼굴의 살이 내리고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얼굴에 나 있던 상처들이 대부분
아물었고 대신 볼에는 수염이 더부룩했다. 경호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아진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서영은 경호의 얼굴에 찬바람과 먼지가 닿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담요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토록 큰 충격을 받고, 그렇게 겹겹인 감정의 고통들을 지나왔음에도 경호가 회복된다는 사실은
기뻤다. 여전히 한 발은 그 지옥을 디디고 서 있는 게 분명한데도 그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다시 유리창을 닦으면서 서영은 그 마음의 정체를 생각했다.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제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다. 배신감이나 복수심 때문도 아니고,
인생에 남편이라는 존재가 필요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굳이 그 마음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러나 서영은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휴머니즘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했고, 그저
정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약한 느낌이었다.
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경호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끝까지 담요를 씌워놓은
경호의 모습이 섬뜩하도록 불길한 일을 연상시켰다. 서영은 서둘러 경호의 얼굴에서 담요를 벗겨 낸 후
보조의자에 앉아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항상 점잖고 단정해서 한 번도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턱에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서영은 손을 뻗어 수염을 쓰다듬어보았다. 꺼칠한 수염의 질감을 손바닥으로 느끼고 있자니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경호가 다른 연인을 두고도 남편으로서 결혼 생활을 무리 없이,
아니 훌륭하게 해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자신도 그가 깨어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 당신도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었어?'
속맘으로 물어놓고 서영은 잠깐 놀랐다. 그 생각을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낯빛이 뜨거워졌다.
요즈음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연인 역할, 아내 역할은 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에 선혈이 맺히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갈라지고 마는,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해변을 쓰는 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박하 잎을 입에 문 듯 온몸이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 경험에 놀라 서영은 경호나 인수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서영은 경호의 담요를 가슴까지 내려 여며준 후 다시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너무 고단해서
작은 호의에 마음이 무너진 것일 뿐이야. 사랑받지 못했다는 충격이 커서, 아직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알게 모르게 그를 유혹했는지도 몰라.
우리 사귈래요? 술김에 뱉었던 그 말이 생각나자 또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영은 힘껏 유리창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창을 다 닦은 후 창을 닫고 돌아서니 복도 쪽 창밖에 인수가 서 있었다. 그는 계속 서영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서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서영이 순간적으로 긴장해서 굳어 있는 사이, 그는 한 손에 한 개씩 들린 컵라면을 얼굴 가까이 들어올려
흔들어 보였다. 서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병실을 나서기 전 경호를
한번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창백한 낯빛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 괜찮아요?"
인수가 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지만 실은 그를 마주보는 순간
그 눈빛이 눈으로 들어와 몸을 관통한 뒤 심장에까지 이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놀라움을 진정시키며 서영은 인수와 함께 매점으로 갔다. 인수는 매점 앞에 비치된 간이 테이블에서
두 개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두 사람은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창가로 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마주보도록 앉았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영은 나무젓가락을 두 쪽으로 갈라 뚜껑 위에
걸쳐 놓았다.
" 오늘은 손톱을 깎아줬어요. 발톱도요."
인수가 그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덤덤한 낯빛과 평온한 목소리로, 사랑도 분노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아내를 간병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 섭취하는 것도 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만 있는데도 손톱 발톱이 꾸준히 자란다는 게 신기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멋대로 자란 경호의 수염도 정리해줘야 했다.
" 남자 분들 면도할 때요.........."
인수는 이미 서영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고 있다는 듯 서영을 건너다보았다. 마음 한켠에서
썰물이 밀려나가는 듯한 표정이어서 서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 면도칼을 움직이는 방향이나 규칙 같은 게 있나요?"
" 네. 우선 처음에는 이렇게..............."
인수는 양손을 들어 광대뼈에서 볼 쪽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행동을 해보였다. 다음으로는
볼에서 턱 쪽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오른손만으로 턱 밑에서 입술 쪽으로 얼굴을
쓸어 보였다. 서영은 턱을 약간 치켜들고 인수의 동작을 따라했다.
" 면도 거품 많이 묻혀서 하시고요, 꼭 애프터 쉐이브용품 발라주세요."
서영은 인수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는 말을 마친 후 컵라면 뚜껑을 열어
면발을 휘저었다. 알맞게 익었음을 확인한 후 용기를 서영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가 건네는 컵라면을
받으며 서영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날이 오다니.........
잘 믿기지 않았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듯하던 그 불면과 고통의 날들이 이렇게 빨리 희미해지다니.
여전히 한쪽 발은 지옥을 디디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고통의 감정은 거의 없었다.
서영은 라면을 우물거리면서 인수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라면을 듬뿍 들어올려 입으로 밀어넣으려다가
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듯 동작을 멈췄다. 서영은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그를 외면했다.
그가 있어 그 지옥의 시간들을 건너온 게 틀림없었다. 그도 그랬으면 싶었다. 우리 사귈래요?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은 서영이었지만, 그날 이후 인수는 자주 서영을 찾아와 이런 저런
부탁을 했다. 처음에는 환자 머리맡에 늘 켜두어야 하는 가습기가 고장났다고 했다.
"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진동 단자의 얼룩을 빡빡 문 질렀는데........."
서영이 눈을 크게 뜨자 인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 네, 나중에 사용설명서 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백히 적혀 있더라구요."
서영이 먼저 웃고 인수가 따라 웃었다.
" 가습기 사러 가는데, 같이 가주시겠어요?"
그날 서영은 인수와 시장 골목에 동행했다. 가습기를 산 후 그릇 가게에도 들렀다. 서영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컵을 골라 인수에게 내밀었다. 등산이나 레저용으로 만들어진 날렵하고
튼튼한 컵이었다.
" 종이컵 쓰시는 거 봤어요."
인수가 물끄러미 컵을 내려다보고 있자 서영은 마치 그 컵을 고안한 사람과도 같은 열성을 담아
설명을 덧붙였다.
"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이중으로 되어 있어 보온 효과가 오래가고, 겉면이 뜨거워지지 않아
손에 쥐기에도 좋은 제품입니다."
인수는 묵묵히 컵을 받아 들고 마치 컵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 라는 메모가 그랬던 것처럼 컵은 컵 이상의 의미였다. 작고 사소한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뿌리부터 움직일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인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부터였다는 것을.
무거운 추처럼 자신을 아래로 끌어당기던 어둡고 딱딱한 감정들을 바로 그날 놓아버렸다.
인수가 손을 놓자 그것들은 까마득히 낮은 곳으로 내려앉았고, 인수의 몸은 순식간에 위쪽으로
높이 솟구쳤다. 밝고, 환하고, 넓은 곳으로. 어느 한순간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게 아니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인수는 그 감각만 믿고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때부터 수진을 간병하는 일이
마음의 어떤 부분도 자극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진의 몸을 닦고 머리를 빗겨주는 손길에
정성이 담겼다. 인수는 그런 변화가 너무 급격해서 사실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때부터 핀
조명으로 무대 위의 인물을 따라가듯 시선으로 줄곧 누군가를 따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인수가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자 서영은 벌써 다 먹었느냐고 묻는 눈빛을 보냈다.
인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서영은 컵을 들어 보이며 면발을 덜어 주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인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서영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서영을 보면서 인수는 자신도 그와 비슷한 웃음을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웃음이 대체로, 종일토록 입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혹시, 운동시키는 거요.............."
인수는 라면을 먹는 서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서영은 입속에서 라면을 우물거리는 채로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 꾸준히 하세요? 관절이나 근육을............"
인수는 팔을 들어 손목 관절을 위아래로 꺾어 보였다. 서영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 이렇게 꺾이는 곳마다 모두 움직여줘야 한대요. 근육도 스트레칭하듯이 쭉쭉 늘여주는 게 좋고요."
인수는 손가락을 굽혔다 펴고, 잡아뺄 듯 손목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인수의 동작을 따라하는
서영의 손목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서영이 민망한 듯 웃으면서 다시 한 번 팔목을
비틀어 당겼다. 아까와 똑같은 소리가 나자 이번에는 인수도 웃었다.
" 이따가 저녁에는 영양 보충이 될 만한 것으로 먹어요."
빈 용기를 치우며 인수가 말을 건넸다.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함께 가습기를 사러
갔던 날 이후, 두 사람은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간병과 휴식 시간이 비슷했고, 간병에 필요한 물건과 정보가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서로 챙기지 않으면 그냥 굶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인수도, 서영도 공유하는 일상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가장 고마웠다.
오후에 서영은 인수에게 배운 대로 경호의 수염을 깎았다. 먼저 가위로 긴 부분을 잘라내고
짧게 남은 부분은 면도날로 밀었다. 애프터 쉐이브 로션을 바르고 나자 경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곁에 있던 간병인 아주머니조차 공연히 들뜨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인수는 그날 오후를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보냈다. 공연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다.
가장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수진을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기고, 전문 간병인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직장과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유폐에 가까운
이 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는.......... 인수는 아직도 그 사실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처지가 비슷한 이들끼리 주고받는 공감이나 연민이었을 것이다. 그후에는 좁은 공간,
비슷한 일상 속에서 자주 스치고 맞닥뜨리다 보니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졌을 것이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같이 숙소를 나설 때 멀리서부터 강둑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기도 했고,
황태국밥집에서 식사하다가 쇠고기 김밥을 먹는 그녀를 보기도 했다. 저녁에 슈퍼마켓에서
담배를 사다가 맥주를 집어 드는 그녀와 마주쳐 웃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민이나 익숙함보다
더 무겁고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를 떠도는 기류 같아서 인수뿐 아니라 서영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 기류 앞에 막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인수는 경호의 병실로 가서 서영을 불러내어 병원을 나섰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폭설이 내릴 때는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역시 봄눈은 힘이 없었다.
그 등등한 기세와는 달리 하루 이틀 사이에 허망할 정도로 자취를 감추었다.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북향의 그늘 속에만 약간의 잔설이 남아 있었다.
인수는 병원 근처의 식당 중 가장 양양한 빛 속에 앉아 있는 한정식집으로 서영을 안내했다.
생선과 육류와 야채가 골고루 놓인 상이 차려졌을 때 인수는 생선찜이며 불고기를 자꾸만
서영 쪽으로 밀어 주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더 먹으라고, 한 숟가락만 더 먹으라고
재촉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식당을 나와 공원쪽으로 산책길을 잡았을 때는 서영이
안쪽에서 걷도록 자신이 차도 쪽으로 옮겨서는 것을 보았다.
" 걷는 거 좋아하시죠?"
인수의 질문에 서영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인수늘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핀 조명처럼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이른 아침에 바다 쪽에서 걸어오는 것도 봤고, 저녁에 강둑을 걷는 것도 봤어요. 점심 때
공원의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기도 했고요."
" 네, 저도 본 적 있어요. 저기 강둑에 서서 절벽 쪽을 보고 있기도 하고, 병원 창가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어요."
이번에는 인수가 눈을 크게 뜨고 서영을 바라보았다. 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고개짓과 웃음 사이로 다시 뜨겁고 묵직한 기류 같은 것이 출렁였다.
" 저기 가본 적 있으세요? 환선굴."
서영이 눈앞에 걸린 도로 표지판을 손짓했다. 인수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서영이 " 언제 한번
가볼래요?" 하고 제안했다. 인수는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공을 받아 안는 듯 당황했다.
인수가 대답이 없자 서영은 고개 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스무 걸음쯤, 혹은 서른 걸음쯤
걸은 후에야 인수는 그 제안과 전혀 무관한 화제를 꺼냈다.
" 지방 공연을 자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도시마다 특별한 색깔이 있어요. 지역색이나
기질 같은 거 말고 진짜 색깔 말예요, 칼라."
서영은 여전히 발끝만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는 이곳 동해안 도시들에서는 대기에
옥색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마도 바다 색깔이 대기에 비쳐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 서울의 대기는 잿빛에 붉은 기운이 섞인 색이고, 부산의 대기는 잿빛에 청색 기운이 섞인 듯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 쪽으로 가면 대기 빛깔에 황톳빛이 섞여 있는 걸
볼 수 있고요."
서영은 인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살았거나 방문했던 도시의 공기들을 떠올려보았다.
물론 기억나지 않았다. 인수는 충청도 예산 덕산 지방을 지날 때 대기에서 초록빛을 보았지만,
그 초록빛 속에 자주색 같은 색감이 묻어 있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었다고 말했다.
" 나중에, 거기 한번 가볼래요?"
인수는 그 말을 아까 서영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서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을 다 걸어 공원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서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공원 입구에서 인수는
한 손을 들어 서영의 어깨를 가볍게 밀면서 그녀를 먼저 들여보냈다. 서영은 입구 오른쪽에 선
아름드리 나무를 발치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회화나무, 수령: 350년. 인수는 나무에
붙은 팻말을 읽으며 문득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 여기 나무들은 모두 우리보다 오래 살았어요."
" 그렇다면 영혼이 있겠네요. 오래된 물건에는 다 영혼이 깃든다고 하던데.........."
서영이 비로소 고개 돌려 인수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탓일까, 눈빛이 더 깊어 보였다.
서영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어 인수는 엄지를 세워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 봐요, 백 년도 못 사는 인간도 영혼이 있는데, 하물며 그보다 오래 사는 생물이 영혼도 없이
살겠어요?"
서영은 희미하게 웃었고, 그 웃음을 보면서 인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토록 눈빛 하나,
웃음 한번에 좌우되는 자신의 마음이 불가사의했지만 인수는 도저히 그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말이 많아지는지도 몰랐다.
" 예전에 어떤 젊은 건축가가 있었는데요.........."
인수는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건축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건축 사무실에
취직해서 열정과 실험정신으로 직업에 열중했던 사람인데, 남의 집 지어주다 보니 시골에
있는 자기 집도 좀 잘 지어놓고 싶었다. 새 집을 지으면서 마당에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베었다.
오래된 나무였다. 그런데 그날로 할아버지가 쓰러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다들 말리는데도
그런 얘기는 비과학적이라 치부하며 막무가내로 나무를 베었던 젊은이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짓던 집을 버려둘 수도 없어 집은 계속 짓기로 했다.
집을 짓다 보니 돈이 부족했다. 집에 딸린 텃밭을 팔아 건축비로 쓰려고 내놓았다.
그 텃밭에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땅을 사려는 사람이 그 나무를 베어주어야만 땅을
사겠다고 했다. 이미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과학만
신봉했던 젊은 건축가는 이번에는 지관을 불러다 날을 잡고, 지관이 시키는 대로 굿도
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무를 벴다. 다행히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쯤, 이번에는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며칠 앓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나누던 얘기를 들은 거예요. 어린 마음에도 오래된 물건들에는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거나 밟지 않았어요."
" 저런 누각에도 영혼이 있을까요?"
서영은 공원 안쪽에 세워져 있는 누각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은
17개의 기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 8개는 돌로 다듬어 세운 것이고 나머지 9개는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보물 213호라고 적혀 있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12세기라면...............
적어도 9백 년은 된 누각이었다.
" 그래요, 틀림없이 영혼이 있을 거예요. 저기 기둥쯤이나 천장쯤에요."
그렇게 말하며 인수는 서영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동시에 서영도 몸을 돌려 인수를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그녀의 눈빛, 입술, 살갗이 있었다.
마침 바닷바람과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서로 방향을 바꾸는 듯 두 사람 주변을 돌아나갔고
인수는 바람이 뿌리고 가는 서영의 체취를 맡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뾰족한 각을 가진
듯한 냄새가 몸을 관통해 지나가자 인수는 주황색이나 보라색 조명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현실 감각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인수는 손을 뻗어, 기어이, 서영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서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인수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순식간에 그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다.
진공의 입구를 향해 빨려드는 것에 저항하듯, 서영은 두 손을 들어 인수의 손을 잡았고, 다음 순간
볼에서 그의 손을 떼어냈다.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럼에도 매혹은 얼마나 강렬한지 온몸으로
전율이 번져 나갔다. 자신이 얼마나 강렬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는지 깨달은 것은 온몸의 떨림이
가라앉은 후였다. 인수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누각 너머 하늘만 보고 있었다.
" 미안해요."
그래도 인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어서 서영은 두려웠다.
아니,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그의 품에서 온몸을 기대면서 그렇게 하자고, 예산이든
덕산이든 함께 떠나자고 말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 미안해요, 먼저 갈께요."
서영은 인수를 그대로 세워둔 채 공원을 가로질러 나왔다. 바람이 사방에서 옷깃을 잡아당기고
짙어지는 어둠이 발길을 막아섰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걷는 듯한,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걷는 듯한
걸음으로 서영은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래, 그와 바람이 나도 좋을 것이다. 서영은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에 담긴 심리적 진실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 방법으로라도 받은 상처만큼 복수해주고 싶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고, 그를 통해 고통의 감정에서 벗어나고, 아직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지만 서영은 그들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범한 오류를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중의 금기였다. 관계가 시작되면 금세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도, 바람도 아니라는 것을.
고통이 너무 커서 아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은 행위거나, 자기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는
자학에 가깝다는 것을. 관계가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은 고통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어느모로 보나 한 발자국도 내디뎌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공원을 나와 도망치듯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서영은 병원 앞에 서 있었다.
등 뒤의 모텔을 한번 돌아본 다음 천천히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호의 병실 앞에 도착해서
차마 병실 문을 열지 못한 채 병실 밖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자세로 오래도록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부끄러웠다. 무의식중에 얼마나 많은 유혹의 제안을, 붙잡아 달라는 신호를 보냈는지
떠오르자 미안하기도 했다. 느닷없는 죄의식 같은 것이 뱃속을 붉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 경호씨, 나 어떻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영은 점차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인수가 있어 현실의 고통을 수월하게
넘기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작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일 때 그것이 곧 자신을 돌보는 행위였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에게 아직은 그런 관심과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다는 것을.
" 이제 겨우 숨쉴 것 같은데, 살아 있다는 이 느낌을 붙들고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
병원 복도는 지나치게 적막해서 먼 곳에서 가벼운 물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내면에서 들끓는 소음은 더 잘 들렸다. 서영은 그 모든 소음을 외면하듯 귀를 막았다.
상체를 한껏 구부린 채 눈을 감고 있자니 다시 맨 처음의 감정, 수술실 바깥에 고장난 가전제품처럼
앉아 있던 암울함이 떠올랐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서영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 저었다.
" 경호씨, 미안해."
그 말을 중얼거릴 때 서영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미안해, 경호씨. 서영은 그 말속에 담긴 욕망과 미래가 너무 커서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텅 빈 병원 복도가 낯선 곳으로 건너가는 현수교처럼 울렁였다.
13연인(戀人)(ⅡStoryFrom_AprilSnow).wma
영화로는 얼마되지 않는 장면들인데..
이렇게 소설로 되니...엄청 기네요...ㅋ
이번엔 자르기도 그래서 ..걍 길게~~ 쭈욱~
인수와 서영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건지...........
서영은 병실 창을 열고 커튼을 젖혔다. 부드러운 바람에도 풀 냄새가 실려오고 봄볕은
가느다란 빛의 화살들처럼 얼굴로 쏟아져내렸다.
얼마전까지 서영은 빛이란 넓적하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빛이 미세한 색깔 화살들의 결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잘 표백된 옥양목 헝겊 같던 형광등 불빛조차 미세한 빛의 가닥들이 엮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조명 오퍼레이터는 항상 조명만 생각해요."
인수의 말을 들은 후부터의 변화였다. 햇볕을 쬘 때면 빛의 화살들이 살갗에 와 닿은 감각을
일일이 가려서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몸의 감각이 그토록 예민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서영은 두 손을 교차하여 팔뚝을 쓸어내린 다음 걸레를 들고 창을 닦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창턱을 다 닦고 유리창을 닦으려다가 서영은 생각난 듯 경호를 돌아보았다. 얼굴에서 산소호흡기를
뗀 그는 예전보다 얼굴의 살이 내리고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얼굴에 나 있던 상처들이 대부분
아물었고 대신 볼에는 수염이 더부룩했다. 경호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아진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서영은 경호의 얼굴에 찬바람과 먼지가 닿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담요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토록 큰 충격을 받고, 그렇게 겹겹인 감정의 고통들을 지나왔음에도 경호가 회복된다는 사실은
기뻤다. 여전히 한 발은 그 지옥을 디디고 서 있는 게 분명한데도 그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다시 유리창을 닦으면서 서영은 그 마음의 정체를 생각했다.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제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다. 배신감이나 복수심 때문도 아니고,
인생에 남편이라는 존재가 필요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굳이 그 마음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러나 서영은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휴머니즘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했고, 그저
정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약한 느낌이었다.
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경호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끝까지 담요를 씌워놓은
경호의 모습이 섬뜩하도록 불길한 일을 연상시켰다. 서영은 서둘러 경호의 얼굴에서 담요를 벗겨 낸 후
보조의자에 앉아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항상 점잖고 단정해서 한 번도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턱에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서영은 손을 뻗어 수염을 쓰다듬어보았다. 꺼칠한 수염의 질감을 손바닥으로 느끼고 있자니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경호가 다른 연인을 두고도 남편으로서 결혼 생활을 무리 없이,
아니 훌륭하게 해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자신도 그가 깨어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 당신도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었어?'
속맘으로 물어놓고 서영은 잠깐 놀랐다. 그 생각을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낯빛이 뜨거워졌다.
요즈음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연인 역할, 아내 역할은 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에 선혈이 맺히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갈라지고 마는,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해변을 쓰는 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박하 잎을 입에 문 듯 온몸이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 경험에 놀라 서영은 경호나 인수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서영은 경호의 담요를 가슴까지 내려 여며준 후 다시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너무 고단해서
작은 호의에 마음이 무너진 것일 뿐이야. 사랑받지 못했다는 충격이 커서, 아직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알게 모르게 그를 유혹했는지도 몰라.
우리 사귈래요? 술김에 뱉었던 그 말이 생각나자 또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영은 힘껏 유리창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창을 다 닦은 후 창을 닫고 돌아서니 복도 쪽 창밖에 인수가 서 있었다. 그는 계속 서영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서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서영이 순간적으로 긴장해서 굳어 있는 사이, 그는 한 손에 한 개씩 들린 컵라면을 얼굴 가까이 들어올려
흔들어 보였다. 서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병실을 나서기 전 경호를
한번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창백한 낯빛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 괜찮아요?"
인수가 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지만 실은 그를 마주보는 순간
그 눈빛이 눈으로 들어와 몸을 관통한 뒤 심장에까지 이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놀라움을 진정시키며 서영은 인수와 함께 매점으로 갔다. 인수는 매점 앞에 비치된 간이 테이블에서
두 개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두 사람은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창가로 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마주보도록 앉았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영은 나무젓가락을 두 쪽으로 갈라 뚜껑 위에
걸쳐 놓았다.
" 오늘은 손톱을 깎아줬어요. 발톱도요."
인수가 그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덤덤한 낯빛과 평온한 목소리로, 사랑도 분노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아내를 간병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 섭취하는 것도 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만 있는데도 손톱 발톱이 꾸준히 자란다는 게 신기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멋대로 자란 경호의 수염도 정리해줘야 했다.
" 남자 분들 면도할 때요.........."
인수는 이미 서영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고 있다는 듯 서영을 건너다보았다. 마음 한켠에서
썰물이 밀려나가는 듯한 표정이어서 서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 면도칼을 움직이는 방향이나 규칙 같은 게 있나요?"
" 네. 우선 처음에는 이렇게..............."
인수는 양손을 들어 광대뼈에서 볼 쪽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행동을 해보였다. 다음으로는
볼에서 턱 쪽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오른손만으로 턱 밑에서 입술 쪽으로 얼굴을
쓸어 보였다. 서영은 턱을 약간 치켜들고 인수의 동작을 따라했다.
" 면도 거품 많이 묻혀서 하시고요, 꼭 애프터 쉐이브용품 발라주세요."
서영은 인수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는 말을 마친 후 컵라면 뚜껑을 열어
면발을 휘저었다. 알맞게 익었음을 확인한 후 용기를 서영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가 건네는 컵라면을
받으며 서영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날이 오다니.........
잘 믿기지 않았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듯하던 그 불면과 고통의 날들이 이렇게 빨리 희미해지다니.
여전히 한쪽 발은 지옥을 디디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고통의 감정은 거의 없었다.
서영은 라면을 우물거리면서 인수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라면을 듬뿍 들어올려 입으로 밀어넣으려다가
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듯 동작을 멈췄다. 서영은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그를 외면했다.
그가 있어 그 지옥의 시간들을 건너온 게 틀림없었다. 그도 그랬으면 싶었다. 우리 사귈래요?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은 서영이었지만, 그날 이후 인수는 자주 서영을 찾아와 이런 저런
부탁을 했다. 처음에는 환자 머리맡에 늘 켜두어야 하는 가습기가 고장났다고 했다.
"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진동 단자의 얼룩을 빡빡 문 질렀는데........."
서영이 눈을 크게 뜨자 인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 네, 나중에 사용설명서 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백히 적혀 있더라구요."
서영이 먼저 웃고 인수가 따라 웃었다.
" 가습기 사러 가는데, 같이 가주시겠어요?"
그날 서영은 인수와 시장 골목에 동행했다. 가습기를 산 후 그릇 가게에도 들렀다. 서영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컵을 골라 인수에게 내밀었다. 등산이나 레저용으로 만들어진 날렵하고
튼튼한 컵이었다.
" 종이컵 쓰시는 거 봤어요."
인수가 물끄러미 컵을 내려다보고 있자 서영은 마치 그 컵을 고안한 사람과도 같은 열성을 담아
설명을 덧붙였다.
"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이중으로 되어 있어 보온 효과가 오래가고, 겉면이 뜨거워지지 않아
손에 쥐기에도 좋은 제품입니다."
인수는 묵묵히 컵을 받아 들고 마치 컵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 라는 메모가 그랬던 것처럼 컵은 컵 이상의 의미였다. 작고 사소한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뿌리부터 움직일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인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부터였다는 것을.
무거운 추처럼 자신을 아래로 끌어당기던 어둡고 딱딱한 감정들을 바로 그날 놓아버렸다.
인수가 손을 놓자 그것들은 까마득히 낮은 곳으로 내려앉았고, 인수의 몸은 순식간에 위쪽으로
높이 솟구쳤다. 밝고, 환하고, 넓은 곳으로. 어느 한순간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게 아니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인수는 그 감각만 믿고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때부터 수진을 간병하는 일이
마음의 어떤 부분도 자극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진의 몸을 닦고 머리를 빗겨주는 손길에
정성이 담겼다. 인수는 그런 변화가 너무 급격해서 사실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때부터 핀
조명으로 무대 위의 인물을 따라가듯 시선으로 줄곧 누군가를 따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인수가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자 서영은 벌써 다 먹었느냐고 묻는 눈빛을 보냈다.
인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서영은 컵을 들어 보이며 면발을 덜어 주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인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서영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서영을 보면서 인수는 자신도 그와 비슷한 웃음을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웃음이 대체로, 종일토록 입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혹시, 운동시키는 거요.............."
인수는 라면을 먹는 서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서영은 입속에서 라면을 우물거리는 채로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 꾸준히 하세요? 관절이나 근육을............"
인수는 팔을 들어 손목 관절을 위아래로 꺾어 보였다. 서영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 이렇게 꺾이는 곳마다 모두 움직여줘야 한대요. 근육도 스트레칭하듯이 쭉쭉 늘여주는 게 좋고요."
인수는 손가락을 굽혔다 펴고, 잡아뺄 듯 손목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인수의 동작을 따라하는
서영의 손목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서영이 민망한 듯 웃으면서 다시 한 번 팔목을
비틀어 당겼다. 아까와 똑같은 소리가 나자 이번에는 인수도 웃었다.
" 이따가 저녁에는 영양 보충이 될 만한 것으로 먹어요."
빈 용기를 치우며 인수가 말을 건넸다.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함께 가습기를 사러
갔던 날 이후, 두 사람은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간병과 휴식 시간이 비슷했고, 간병에 필요한 물건과 정보가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서로 챙기지 않으면 그냥 굶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인수도, 서영도 공유하는 일상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가장 고마웠다.
오후에 서영은 인수에게 배운 대로 경호의 수염을 깎았다. 먼저 가위로 긴 부분을 잘라내고
짧게 남은 부분은 면도날로 밀었다. 애프터 쉐이브 로션을 바르고 나자 경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곁에 있던 간병인 아주머니조차 공연히 들뜨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인수는 그날 오후를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보냈다. 공연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다.
가장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수진을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기고, 전문 간병인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직장과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유폐에 가까운
이 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는.......... 인수는 아직도 그 사실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처지가 비슷한 이들끼리 주고받는 공감이나 연민이었을 것이다. 그후에는 좁은 공간,
비슷한 일상 속에서 자주 스치고 맞닥뜨리다 보니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졌을 것이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같이 숙소를 나설 때 멀리서부터 강둑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기도 했고,
황태국밥집에서 식사하다가 쇠고기 김밥을 먹는 그녀를 보기도 했다. 저녁에 슈퍼마켓에서
담배를 사다가 맥주를 집어 드는 그녀와 마주쳐 웃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민이나 익숙함보다
더 무겁고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를 떠도는 기류 같아서 인수뿐 아니라 서영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 기류 앞에 막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인수는 경호의 병실로 가서 서영을 불러내어 병원을 나섰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폭설이 내릴 때는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역시 봄눈은 힘이 없었다.
그 등등한 기세와는 달리 하루 이틀 사이에 허망할 정도로 자취를 감추었다.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북향의 그늘 속에만 약간의 잔설이 남아 있었다.
인수는 병원 근처의 식당 중 가장 양양한 빛 속에 앉아 있는 한정식집으로 서영을 안내했다.
생선과 육류와 야채가 골고루 놓인 상이 차려졌을 때 인수는 생선찜이며 불고기를 자꾸만
서영 쪽으로 밀어 주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더 먹으라고, 한 숟가락만 더 먹으라고
재촉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식당을 나와 공원쪽으로 산책길을 잡았을 때는 서영이
안쪽에서 걷도록 자신이 차도 쪽으로 옮겨서는 것을 보았다.
" 걷는 거 좋아하시죠?"
인수의 질문에 서영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인수늘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핀 조명처럼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이른 아침에 바다 쪽에서 걸어오는 것도 봤고, 저녁에 강둑을 걷는 것도 봤어요. 점심 때
공원의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기도 했고요."
" 네, 저도 본 적 있어요. 저기 강둑에 서서 절벽 쪽을 보고 있기도 하고, 병원 창가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어요."
이번에는 인수가 눈을 크게 뜨고 서영을 바라보았다. 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고개짓과 웃음 사이로 다시 뜨겁고 묵직한 기류 같은 것이 출렁였다.
" 저기 가본 적 있으세요? 환선굴."
서영이 눈앞에 걸린 도로 표지판을 손짓했다. 인수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서영이 " 언제 한번
가볼래요?" 하고 제안했다. 인수는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공을 받아 안는 듯 당황했다.
인수가 대답이 없자 서영은 고개 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스무 걸음쯤, 혹은 서른 걸음쯤
걸은 후에야 인수는 그 제안과 전혀 무관한 화제를 꺼냈다.
" 지방 공연을 자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도시마다 특별한 색깔이 있어요. 지역색이나
기질 같은 거 말고 진짜 색깔 말예요, 칼라."
서영은 여전히 발끝만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는 이곳 동해안 도시들에서는 대기에
옥색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마도 바다 색깔이 대기에 비쳐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 서울의 대기는 잿빛에 붉은 기운이 섞인 색이고, 부산의 대기는 잿빛에 청색 기운이 섞인 듯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 쪽으로 가면 대기 빛깔에 황톳빛이 섞여 있는 걸
볼 수 있고요."
서영은 인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살았거나 방문했던 도시의 공기들을 떠올려보았다.
물론 기억나지 않았다. 인수는 충청도 예산 덕산 지방을 지날 때 대기에서 초록빛을 보았지만,
그 초록빛 속에 자주색 같은 색감이 묻어 있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었다고 말했다.
" 나중에, 거기 한번 가볼래요?"
인수는 그 말을 아까 서영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서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을 다 걸어 공원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서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공원 입구에서 인수는
한 손을 들어 서영의 어깨를 가볍게 밀면서 그녀를 먼저 들여보냈다. 서영은 입구 오른쪽에 선
아름드리 나무를 발치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회화나무, 수령: 350년. 인수는 나무에
붙은 팻말을 읽으며 문득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 여기 나무들은 모두 우리보다 오래 살았어요."
" 그렇다면 영혼이 있겠네요. 오래된 물건에는 다 영혼이 깃든다고 하던데.........."
서영이 비로소 고개 돌려 인수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탓일까, 눈빛이 더 깊어 보였다.
서영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어 인수는 엄지를 세워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 봐요, 백 년도 못 사는 인간도 영혼이 있는데, 하물며 그보다 오래 사는 생물이 영혼도 없이
살겠어요?"
서영은 희미하게 웃었고, 그 웃음을 보면서 인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토록 눈빛 하나,
웃음 한번에 좌우되는 자신의 마음이 불가사의했지만 인수는 도저히 그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말이 많아지는지도 몰랐다.
" 예전에 어떤 젊은 건축가가 있었는데요.........."
인수는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건축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건축 사무실에
취직해서 열정과 실험정신으로 직업에 열중했던 사람인데, 남의 집 지어주다 보니 시골에
있는 자기 집도 좀 잘 지어놓고 싶었다. 새 집을 지으면서 마당에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베었다.
오래된 나무였다. 그런데 그날로 할아버지가 쓰러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다들 말리는데도
그런 얘기는 비과학적이라 치부하며 막무가내로 나무를 베었던 젊은이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짓던 집을 버려둘 수도 없어 집은 계속 짓기로 했다.
집을 짓다 보니 돈이 부족했다. 집에 딸린 텃밭을 팔아 건축비로 쓰려고 내놓았다.
그 텃밭에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땅을 사려는 사람이 그 나무를 베어주어야만 땅을
사겠다고 했다. 이미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과학만
신봉했던 젊은 건축가는 이번에는 지관을 불러다 날을 잡고, 지관이 시키는 대로 굿도
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무를 벴다. 다행히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쯤, 이번에는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며칠 앓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나누던 얘기를 들은 거예요. 어린 마음에도 오래된 물건들에는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거나 밟지 않았어요."
" 저런 누각에도 영혼이 있을까요?"
서영은 공원 안쪽에 세워져 있는 누각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은
17개의 기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 8개는 돌로 다듬어 세운 것이고 나머지 9개는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보물 213호라고 적혀 있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12세기라면...............
적어도 9백 년은 된 누각이었다.
" 그래요, 틀림없이 영혼이 있을 거예요. 저기 기둥쯤이나 천장쯤에요."
그렇게 말하며 인수는 서영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동시에 서영도 몸을 돌려 인수를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그녀의 눈빛, 입술, 살갗이 있었다.
마침 바닷바람과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서로 방향을 바꾸는 듯 두 사람 주변을 돌아나갔고
인수는 바람이 뿌리고 가는 서영의 체취를 맡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뾰족한 각을 가진
듯한 냄새가 몸을 관통해 지나가자 인수는 주황색이나 보라색 조명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현실 감각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인수는 손을 뻗어, 기어이, 서영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서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인수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순식간에 그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다.
진공의 입구를 향해 빨려드는 것에 저항하듯, 서영은 두 손을 들어 인수의 손을 잡았고, 다음 순간
볼에서 그의 손을 떼어냈다.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럼에도 매혹은 얼마나 강렬한지 온몸으로
전율이 번져 나갔다. 자신이 얼마나 강렬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는지 깨달은 것은 온몸의 떨림이
가라앉은 후였다. 인수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누각 너머 하늘만 보고 있었다.
" 미안해요."
그래도 인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어서 서영은 두려웠다.
아니,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그의 품에서 온몸을 기대면서 그렇게 하자고, 예산이든
덕산이든 함께 떠나자고 말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 미안해요, 먼저 갈께요."
서영은 인수를 그대로 세워둔 채 공원을 가로질러 나왔다. 바람이 사방에서 옷깃을 잡아당기고
짙어지는 어둠이 발길을 막아섰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걷는 듯한,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걷는 듯한
걸음으로 서영은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래, 그와 바람이 나도 좋을 것이다. 서영은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에 담긴 심리적 진실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 방법으로라도 받은 상처만큼 복수해주고 싶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고, 그를 통해 고통의 감정에서 벗어나고, 아직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지만 서영은 그들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범한 오류를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중의 금기였다. 관계가 시작되면 금세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도, 바람도 아니라는 것을.
고통이 너무 커서 아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은 행위거나, 자기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는
자학에 가깝다는 것을. 관계가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은 고통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어느모로 보나 한 발자국도 내디뎌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공원을 나와 도망치듯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서영은 병원 앞에 서 있었다.
등 뒤의 모텔을 한번 돌아본 다음 천천히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호의 병실 앞에 도착해서
차마 병실 문을 열지 못한 채 병실 밖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자세로 오래도록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부끄러웠다. 무의식중에 얼마나 많은 유혹의 제안을, 붙잡아 달라는 신호를 보냈는지
떠오르자 미안하기도 했다. 느닷없는 죄의식 같은 것이 뱃속을 붉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 경호씨, 나 어떻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영은 점차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인수가 있어 현실의 고통을 수월하게
넘기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작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일 때 그것이 곧 자신을 돌보는 행위였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에게 아직은 그런 관심과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다는 것을.
" 이제 겨우 숨쉴 것 같은데, 살아 있다는 이 느낌을 붙들고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
병원 복도는 지나치게 적막해서 먼 곳에서 가벼운 물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내면에서 들끓는 소음은 더 잘 들렸다. 서영은 그 모든 소음을 외면하듯 귀를 막았다.
상체를 한껏 구부린 채 눈을 감고 있자니 다시 맨 처음의 감정, 수술실 바깥에 고장난 가전제품처럼
앉아 있던 암울함이 떠올랐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서영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 저었다.
" 경호씨, 미안해."
그 말을 중얼거릴 때 서영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미안해, 경호씨. 서영은 그 말속에 담긴 욕망과 미래가 너무 커서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텅 빈 병원 복도가 낯선 곳으로 건너가는 현수교처럼 울렁였다.
13연인(戀人)(ⅡStoryFrom_AprilSnow).wma
영화로는 얼마되지 않는 장면들인데..
이렇게 소설로 되니...엄청 기네요...ㅋ
이번엔 자르기도 그래서 ..걍 길게~~ 쭈욱~
인수와 서영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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