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텔은 병원보다 두어 발자국쯤 뒤로 물러선 지점에 병원을 곁눈질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병원 옆구리의 무너진 담장을 나와 도로를 하나 건너면 바로 모텔이었다.
모텔도 병원처럼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주변의 나지막한 단층짜리 주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덩치가 커 보였다. 두 건물 모두 흰색 타일로 외벽을 마감하고 있었지만 모텔 벽이
병원 벽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50대쯤으로 보이는 모텔의 주인사내는 말투나 태도가 모텔 건물처럼 무뚝뚝해 보였다.
인수가 큰 가방을 들고 혼자 들어서자 그는 단박에 인수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장기 투숙할 고객이며, 길 건너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의 보호자라는 사실 같은 것.
" 2층 구석 쪽 방이어서 조용할 겁니다. 도로 쪽으로 창이 나 있어 활기도 느껴지고요."
주인사내는 장기 투숙객의 경우 일주일치씩 숙박비를 선불로 지급하면 10퍼센트 할인 혜택을
준다고 했다. 인수는 아무 생각도 판단력도 없는 사람처럼 주인사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사내는 열쇠를 건네주고 복도 왼쪽을 가리키며 그 끝에 계단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복도 바닥에 깔려 있는 팥죽색 줄무늬
카펫이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닿는 곳은 쉬어버린 팥죽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조도를 낮추고 몇 군데 간접 조명으로 포인트를 주어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인수는 어둠침침한 복도를 살피며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꽃무늬 벽지를 바른 복도 양편으로는 회색 철제 방문들이 도열해 있었다.
서영이 그 방문들 중 하나를 열고 복도로 나온 것은 그때였다. 인수가 방문에 붙은 숫자를
확인하고 있을 때 서영은 고개 숙인 채 방에서 나와 그 자세 그대로 방문을 잠갔다. 인수는
잠시 걸음이 멎었다. 그 여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붙박이 장식품처럼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
중환자실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하염없이 안쪽을 들여다보던 여자, 경찰서와 공업사에
동행했던 여자. 그리고 수진과 관계있는 그 남자와 관계있는 여자였다.
서영은 문을 잠근 후 고개 들다가 인수를 보았다. 그녀 역시 인수를 알아보았다. 남편과 관계있는
여자와 관계있는 남자. 서영은 이내 아무 일 없었던 듯, 그러나 인수를 의식하는 게 분명한
태도로 인수 곁을 지나쳐 갔다. 찬바람이 이는 듯한 태도였다.
" 잠깐만요."
인수는 갑자기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서영은 걸음을 멈춘 후 천천히, 마지못해하듯
몸을 돌렸다.
" 무슨 일이시죠?"
서영은 둥근 음색을 일부러 뾰족하게 만들어 귀찮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인수는 한 걸음 성큼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서영은 그런 인수에게
대항하듯 버티고 서서 서늘한 눈빛을 건넸다.
" 남편 분이 출장 중이었던 게 맞습니까?"
인수는 그 질문에 많은 의미를 담아 건넸다. 당신도 알고 있는가, 남편의 외도를, 그 상대를,
교통사고의 진정한 의미를. 서영 역시 인수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충격과 분노 속에 있다는 것을. 서영이 디지털 카메라에서 본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 상응할 만한 어떤 실마리와 만났다는 것을. 그럼에도 서영이 경호의 담요를
여며주고, 서울로 가서 간병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왔듯이 그 역시 그러했다는 것을.
" 맞습니다."
서영은 되도록 단호하게 말했다. 경호를 보호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문제로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쓸데없이 종기를 쥐어짜 상처가 덧나고 흉터가 크게 남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또 다른 진창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피하고 싶었다.
" 제 아낸 휴가 중이었습니다."
인수는 서영의 그런 마음까지 알아차렸다.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해봐야,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봐야 가당찮은 헛수고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서영은 낯선
남자가 들이 미는 날것의 진실 앞에서 몸과 마음이 딱딱해졌다.
대체 내게 왜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서영이 따지듯 묻기 전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 저는 아내가 부업 때문에 같이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그쪽도 그렇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영은 반응을 기다리는 듯한 인수를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렸다. 그럼에도 이미 질문과 답변
사이에서 많은 것을 나누었다. 저마다 안고 있는 충격과 배신감, 그럼에도 각자의 배우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까지. 서영은 복도 끝에 다다라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인수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텔을 나선 후 서영은 병원으로 건너가는 도로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차선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 길을 건너기만 하면 바로 병원이었다. 천천히 걸어 병원으로 들어섰으나 바로 현관 쪽으로
가지 못한 채 병원 마당과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았다. 병원 뒤쪽에는 담도 없고 문도 없는
출입구가 있었는데 약간 비스듬한 언덕길로 이어져 있었다.
서영은 병원을 뒤에 둔 채 천천히 그 언덕길로 올라갔다. 좌우로 한없이 이어지는 강둑 길이
펼쳐졌다. 강둑에 올라서니 반대편 아래쪽으로 아득히 낮은 곳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곧 바다에 닿아가는 강은 먼 길 끝에 한숨 돌리듯 이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강폭이 넓었다. 강 건너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붉은빛 바위가 강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절벽이었다.
한동안 단애(斷崖)를 보고 있자니 서영은 그 수직면을 따라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정작 나쁜 것은 경호의 부상이나 그의 외도,
혹은 정전된 가전제품처럼 무력해진 몸과 마음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보다 가장 나쁜 것은
느닷없이 감지되는 자기 비하감이나 열패감이었다. 심지어 죄의식까지 일었다.
어떤 점이 경호에게 부족했을까, 어떤 면에서 주부나 아내로서 소홀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솟구칠 때마다 이건 아니라고, 공연한 죄의식이나 열패감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려도 그 감각은 몸에서 먼저 느껴졌다. 몸이 마르며 살갗이 죄어오는 듯했다.
저기 중환자실에 경호와 나란히 누워 있는 여자에 대해 감히 질투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패배감이 느껴졌다.
서영은 강 건너 절벽 꼭대기에서 꽃잎처럼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환영을 거듭 바라보다가
그만 몸을 돌렸다. 심호흡을 한 후 병원으로 들어갔다. 중환자실로 들어서면 그 여자의 병상은
경호의 것보다 더 입구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의 병상을 지날 때 서영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기 위해, 경호의 마음을 손에 넣은 여성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위해 병실 바닥을 힘주어 디뎠다.
경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서영은 경호의 얼굴, 산소호흡기에 가려져 감긴 눈과
이마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건 불공정해. 빨리 깨어나서 내게 말해봐.
변명이든, 핑계든 내게 내밀어봐. 서영은 금방이라도 울부짖는 소리가 몸밖으로 나올 것 같아
손에 힘을 주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체온과 맥박을 체크하고 돌아간 후 서영은 그의 팔다리를 주물로주고 가습기의
물을 갈았다. 담요를 어깨까지 꼼꼼히 여며주고 나자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난
턱으로 눈이 갔다. 그 턱이 여자의 어깨로 파고들던 동영상이 떠올랐다. 그의 신체 모든 곳에서
그 살갗을 쓰다듬고 어루만졌을 여자의 손길이 보였다. 가슴으로 칼날이 들어오는 듯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영은 결국 보조의자에서 일어나 수진의
병상 쪽으로 걸어갔다. 얼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한 채 침대 발치쯤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그녀의 얼굴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녀 역시 산소 마스크로 무장되어 있어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빛이 돌 정도로 흰 이마뿐이었다. 주사관을 꽂은 채 담요 바깥으로 나와 있는 팔과 손등에는
긁히고 벗겨진 상처투성이였다.
저토록 무력하고 가당찮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사람에게 이토록 지리멸렬한 열패감을 느끼다니.......
그 사실이 더 지독했다. 서영은 그녀가 깨어났으면 싶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 말하는 방식,
눈빛의 깊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경호에게 주지 못한 무엇을 그녀가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마음이 벌써 열패감이었다. 그녀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
"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서영은 정신을 차렸다. 그 남자가 서 있었다. ' 남편 분이 출장
중이었던 게 맞습니까?' 라고 물었던 사람. 그는 막 울고 난 사람처럼 눈가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서영은 남자를 외면한 채 황급히 경호의 병상으로 돌아왔다. 보조의자에 앉아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무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그녀를 보고 나니 마음이 좀 편안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가 여우나 괴물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서영은 고개를 들고 경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 당신, 저 여자 많이 사랑했어?' 속으로
그렇게 물었을 뿐인데도 다시 가슴으로 칼날이 지나갔다. 서영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천천히 쓰다듬을 때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 사람이었다.
'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고 물었던 사람. 그는 경호의 침대 발치쯤에 멈춰 서서 굳은 듯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서영은 점차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도 똑같은 기분일까. 터무니없는
자기 비하감, 열패감, 심지어 죄의식까지.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서 서영은 자신의 감정도
그의 숨결을 따라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이유 없이 간구하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거친 숨결이 거의 위기감을 몰고 오고, 그 끝에 어지러움이 밀려올 때 그가 고개 돌려 경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1초나 2초 정도.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침대에서 멀어져갔다. 그도 두려워하는구나. 경호를 마주 보기가, 배신당하고 패배했음을 인정하기가
두려운 모양이구나. 서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빈 옷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걸음......... 자신의 뒷모습도 저럴까 싶었다.
모텔에서 장면은 화면상 많이 어두워서..
나름 좀 밝게 해서 캡쳐를 했는데...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
이 부분을 옮기면서...
서영과 인수의 맘이 참...서늘했을거로 짐작되네요..
저리 말하면서...인수의 속내는 과연 어떠했을지...
수진의 얼굴을 보며...서영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인간의 양면성이랄까.... 이중성이랄까....
수많은 생각들이 얽히고 얽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매듭조차 찾을수가 없는...
그 깊이조차 가늠할수 없는 끝없이 캄캄한 터널속으로...빠져드는것만 같은...
그 내면은 비바람 치는 폭풍속에 차가운 눈보라 같을진데.....저 고요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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