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 시간이 끝나 중환자실을 나서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영은 구내매점에서
우산을 구입한 후 겨울 거리로 나섰다. 열패감이나 죄의식보다 더 나쁜 것은 불면이었다.
며칠째 잠을 잘 수 없었다. 사고 첫날은 수술실 밖에서 걱정으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은
동영상을 본 후여서 잠을 자지 못했다. 밤이면 신경들이 점점 더 예민하게 깨어나며 맑고
예리해졌다. 서영은 마침 눈앞에 보이는 약국으로 들어가 약사에게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 최근에 갑자기 놀라거나 스트레스 받은 일 있습니까?"
젊은 약사는 범상하게, 늘 있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물었다. 서영은 잠깐 맥이 빠졌다.
그래, 그냥 놀라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 아닌가. 공연히 호들갑스럽게 전기가 나간
가전제품처럼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자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약사는 조제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흰 봉투에 담긴 약을 건네주었다.
" 아무리 잠이 안 온다고 해도 하루에 한 알 이상 먹으면 안 됩니다."
서영이 약봉지를 받아 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동안 약국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약사가 새 손님을 향해 "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약사는 서영이 건네는 돈을 받으며 다시 한 번 "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라고 다시 물었다. 서영은 약국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새 손님을 보았다.
또 그 사람이었다. 경호의 침대 발치에 서 있다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떠났던 사람.
서영은 그를 외면하면서 약국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약사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 잠이 잘 안 와서 그러는데요.........."
서영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무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똑같은 충격, 똑같은 열패감, 똑같은 불면. 잠이 잘 오지 않고, 억지로 자려 해도 잠의 품질이
나쁘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가시밭길을 헤매다 온 것 같은 컨디션. 서영은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그가 알고 있다면.......... 서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카메라를
돌려주는 게 옳을 것이다. 카메라에 담긴 동영상을 보고 그가 어떤 감정에 휩싸일지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왕 알게 된 거, 마지막까지 제대로 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서영은 모텔 현관에 도착해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우산도 없이, 점퍼 후드를 머리에 쓴 채
비를 맞으며 걸어왔다. 점퍼며 바지가 더 젖어도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태도, 비에 젖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상황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모텔 현관으로 들어설 때 서영이 말을 건넸다.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인수가 서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영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덧붙였다.
" 돌려드릴 것도 있구요."
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려줄 것이 무엇인지, 할 말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서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서영이 아니라 서영의 어깨 너머, 비 내리는 밤거리 너머, 아득한 어둠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서영은 그의 어깨를 흔들듯 질문했다.
"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인수는 대답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서영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라 들어와 서영과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대답했다.
" 아내의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를 봤습니다."
" 저도 그쪽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를 봤어요."
서영은 두 사람이 찍은 사진도 봤다고 말했다. 동영상이 담긴 디지털 카메라가 있는데, 그것을
돌려드릴 참이라고도 말했다. 방 앞에 다다랐을 때 서영은 인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그 사이 인수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한 지점만 건드리면 고스란히 무너져내릴 것 같은 자세였다.
이 카메라가 기어이 저 사람을 무너뜨릴지도 모르겠구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영은 자신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열패감과 죄의식을 뚫고 마음 어느 구석에서인가 미미한 가학이나 피학의 충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서영은 카메라만 건네준 후 서둘러 문을 닫으려 했다. 그와 조금 더 마주보고 있다가는 그의 절망과
자신의 복잡한 감정들이 만나 폭발을 일으킬 것 같았다. 내면에서 감지되는 정체불명의 가학 충동도
두려웠다. 서영이 막 문을 닫으려는데 인수가 " 저기........" 하면서 서영을 불렀다.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서영은 두려움을 참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더 낮게. 더 깊숙이
추락하게 만드는 어떤 장치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 그쪽 남편 분 문자 좀 확인해볼 수 없을까요?"
서영은 그거였구나 싶었다. 아직도 만나야 할 충격적인 일이 남아 있다면 그거였다.
서영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도 그의 아내의 휴대전화기에 남겨진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경호의 육성, 내밀한 목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동영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으랴 싶었다.
서영과 인수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모텔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찻집에서 다시 만났다. 자전거 도둑. 찻집은 오래된 영화 제목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다.
핑크빛의 긴 드레스를 입은 찻집 여자 역시 옛날 영화에서 걸어 나온 인물처럼 보였다.
그녀는 영화배우와 같은 과장된 인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장식을 그대로 두었는지
실내는 온통 자잘한 알전구들이 빛나고 있었다.
주문한 차가 나오고, 그 차를 반쯤 마실 때까지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서영은 그와 자신이
저마다 다른 흙구덩이에 앉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저마다의 구덩이에 갇혀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 가면서,
상대방은 어떤 방식으로 깊어지는 구덩이를, 좁혀져 오는 흙더미를 견디고 있는지 지켜보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깨고 먼저 테이블 중앙에 휴대전화기를 올려놓은 사람은 인수였다. 서영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인수가 한 것처럼 그 옆에 경호의 핸드폰을 올려놓고 거기 있는 수진의 휴대전화기를
집었다. 상대의 흙구덩이 위로 또 한 삽의 흙을 뿌려주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저마다 전화기 폴더를 열고 배우자가 다른 이성에게 보낸 날것의 육성을 확인하는 일은 스스로의
심장을 향해 칼날을 꽂는 행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내일 만남에 대비해서 몸과 맘 준비중. 많이 보고 싶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시간이 사고 전날 밤 열 시쯤이었다. 그 시간에 서영은 경호의 출장 가방을
싸고 있었다.
네 눈빛, 목소리, 손길이 다 그리워.
저쪽에서 ' 나도 보고 싶어. 많이' 라고 왔던 답신에 대한 재답장 같았다. 서영은 거칠게
전화기 폴더를 닫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도 경호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그는 너무 점잖아서 그런 말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맞은편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마비되는 듯 가면처럼 딱딱해지고 있었다. 서영은 그런 그를 향해 가학이나 피학의 감정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강화된 그 감정 때문에 서영은 다시 망설였다.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남자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건네주는 행위는 틀림없이 치명적인 행동이었다. 그 동영상을 보고 그가 어떤
상태로 치달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남편의 물건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나중에 보세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듯 서영은 간곡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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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
믿었던 모든것이 한순간에 무너짐을 경험하는 인수...
그 어둠의 늪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질척일런지...
그 끝은 어디로 가야만 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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