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스크랩] 외출..............소설로 보다.......그 일곱번째 이야기...

중독1106 2008. 3. 17. 18:33

 

  인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칼날처럼 느껴지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간이 주점의 흔들리는 식탁도, 석쇠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도, 벽에 걸린 왕골 장식품도

자신을 향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 피해의식을 지울 듯 고개 저으며 소주를 또 한 잔 마신 다음

광일에게 빈 잔을 건넸다. 광일은 인수가 따라 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네번째 병이 반쯤 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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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친 수진이를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

 

  인수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통받는 수진을 보면서 그때는 차라리 자신이 다쳤으면 싶었다.

그러나 며칠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람에게 "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라고

말했다. 이제 인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일순간에 거짓과 허위로 판명 난 삶도 믿을 수 없었다.

콘크리트처럼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문득 먼지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이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깨어나실 거에요."

 

  위로조차 조롱처럼 들리는 고통이 있음을 인수는 또 처음 알았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없는

시간을 내어 달려온 광일의 선의를 잘 알면서도 조롱당하는 고통 역시 생생했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어떤 타인도 위로가 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눈앞의 술병도, 익어가는

고기도, 안주를 준비하는 주점 사내도 모두 음험한 배후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후배마저

분노와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신이 인수는 두려웠다. 얼마나 더 낮은 곳으로, 제어장치 없이,

언제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었다.

 

  " 너는......... 와이프랑 잘 지내냐?"

 

  " 그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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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일의 말투는 편안했다. 그냥.........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고,

지나치게 잘 지낸다고 느꼈던 게 문제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 지나침을 은근히 내세우고 싶어

하기도 했다. 자주 수진을 공연장에 초대하고, 그때마다 수진이 꽃다발을 들고 올때, 그런 관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아름다워 보였던 관계 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광일이라도 우선 웃음부터 터뜨릴 것이다. 인수는 그것마저 지레 고통스러웠다.

 

  " 광일아............. 너는 내가 우습게 보이냐?"

 

  인수는 자신이 진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품위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점차 낮은 곳으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 아니요 " 라고 대답하는 광일의 목소리가 또다시 조롱과 위선에 찬 듯 들렸다.

인수는 큰 음료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다.

인수가 술잔을 들어올릴 때 광일이 말리듯 그 잔을 잡았다. 함께 잔을 잡고 서로 힘을 버티고

있자니 인수는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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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하다, 광일아. 너 먼저 가라."

 

  인수는 폭발하는 내면을 광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광일은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인수를 건너다보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인수는 그런 태도조차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크게 가라고 소리치자 광일은 마지못해하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선 채로 또 움직이지 않았다.

  

  " 제발, 광일아!"

 

  인수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하는 듯했다. 그제야 광일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쳐 테이블에서 멀어졌으나 주점 입구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한 팔에는 재킷을,

다른 어깨에는 가방을 걸친 채 광일은 주점 입구에 오래 서 있었다. 인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예 가버리지도, 본격적으로 달려들어 말리지도 못하는 광일의 입장도 이해할 만했다.

인수는 큰 잔에 든 소주를 다 마신 다음 테이블 위에 이마를 대고 쓰러지듯 엎드렸다. 엎드리기 전,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입구의 광일에게 그만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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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는 뱃속에서 통곡 같은 것이 올라오면서 몸이 흔들렸다.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디지털 카메라의 동영상 화면을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눈을 뜨고 있어도

보였다. 인수는 수진이 고양이처럼 품으로 파고드는 몸짓을 좋아했다. 무릎 위에 날렵하게

올라앉거나, 겨드랑이 쪽으로 간지럽게 파고들거나, 배에 얼굴을 묻고 비벼대던 그 동작들을

사랑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한다고 믿었던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행동들이 난전에 내놓은 듯

드러나 있었다. 인수가 고통스러운 것은 수진이 다른 남자와 알몸을 부볐다는 게 아니었다.

소중한 것,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거나 세상에 내놓지 않고 숨겨두었던 삶의 고갱이를 단칼에

훼손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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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 중환자실로 수진을 면회 갔을 때 인수는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광대뼈며 입가의 근육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면서 얼굴에 분노와 울분의 표정을 만들어냈다.

거울을 보았다면 아마도 낯선 괴물을 만났다고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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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인수는 그 괴물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망설이거나 주워 담지 않기 위해 한층 단호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순간 인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황급히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도피였다. 언제

뛰쳐나올지 모르는 내면의 괴물로부터, 그 괴물 역시 명백한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부터의 도피였다.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그 말을 할 때 가슴이나 팔뚝에서

느껴지는 살의가 얼마나 생생한지 그대로 있다가는 손을 들어 수진의 목을 누를 것 같았다.

얼굴 근육이 그랬듯이 인수는 자신의 모든 신체 기관과 감정들이 의지나 통제 바깥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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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일에게 가라고 소리 지른 것도 그 괴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점 테이블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니 주인사내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겉옷을 챙겨 입고, 테이블 위에 술값을 꺼내 놓고 주점을 나서자

거리조차 적막했다. 인수는 그 거리 어디쯤에서 광일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광일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수는 되도록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그럴수록 걸음은 더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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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도 알고 있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살의도, 내면의 악마도, 타는 듯한 분노도

모두 사랑이라는 것을. 거절당한 사랑, 속임당한 사랑, 엎어진 사랑, 외면할 수 없는 사랑.........

그것들이 서로 부대끼고 덜그럭거리면서 상반된 감정을 퍼올리고 있다는 것을.

광포하게 골목을 내달리는 겨울바람조차 인수의 내면에서 회오리쳐 나온 것 같았다.

그때 인수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제발 감정이 단선적인 것이기를, 사랑이든 미움이든

한 가지 감정만 느낄 수 있기를.........

 

  인수가 광포한 겨울바람 속을 걷고 있을 때 서영은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그 바람 소리를 들었다. 산의 정상에서 내달려왔거나, 바다 한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달려왔을

바람이 서영의 창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갈 곳을 잃은 듯 서성이기도 했다.

서성이다가 다시 바쁜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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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 바람 소리가 심해질 때마다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실수록 맥이 잦아들었다. 숨이 얕아지고

몸의 기력들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거대한 뻘밭이나 진공이 되어 몸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노란색 장판, 베이지색 벽지, 붉은 꽃무늬 이불이 진공의 촉수를 뻗고 있었다. 술을 마실수록

신경이 곤두섰고, 그럴수록 거듭 술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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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새끼!"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중얼거려보았지만 내면의 답답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낮에 서영은

경호의 면회 시간에 맞추어 모텔을 나섰으나 병원으로 건너가는 도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병원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는 바람이 뒤통수를 당기는 듯해 공연히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대낮의 도시는 적막했다. 길 왼쪽으로는 오래된 주택들이 야트막하게 서서 조용히

낡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듯한 활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당에 빨래가 널려 있거나

우편함에 우편물이 꽂혀 있기는 했다. 길 오른쪽 공터에는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서 있었고

나무 아래는 옹기종기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밖에 걷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공원이 나타났다.

 

  서영은 공원으로 들어서다가 초입에서 걸음을 멈췄다. 입구 오른쪽에 키 크고 둥치 튼실한

나무가 가슴에 플라스틱 팻말을 달고 서 있었다. 회화나무. 분류: 콩과, 수령: 350년.

서영은 나무 둥치의 벌어진 각질 틈마다 푸르게 피어 있는 이끼를 한참 바라보았다. 350년...........

그 시간이 가늠되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이 지옥 같았기에 더욱 그랬다. 350년을 살았다는

나무를 발치에서 머리끝까지 거듭 훑어보면서 몸이 아주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서영은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마치 중요한 일거리인 듯 모든 나무의 나이를 살펴보았다.

향나무 60년, 느티나무 150년, 박태기나무 120년, 배롱나무 250년, 멀구슬나무 45년...........

공원을 다 돌아 나올 때쯤 가슴이 얼얼해져 있었다. 그 공원에 있는 어떤 나무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중 자신과 나이가 가장 가까운 45년 짜리 멀구슬나무 둥치에 이마를 대고

한동안 서 있었다. 아니야, 삶이 이럴 수는 없어.......... 그렇게 중얼거릴 때 서영은 그 나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때 서영이 원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잠을 자는 것. 사랑도 배신도 분노도 다 그만두고 그저

잠을 잘 수 있었으면 싶었다. 350년생 회화나무 꼭대기에서든, 그 나무를 쓰다듬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든, 45년짜리 멀구슬나무 둥치에 기대서든 잠들고 싶었다. 일단 잠이 들면

겨울잠을 자는 곰보다 더 깊이, 영면에 든 사람보다 더 오래 잘 생각이었다. 배가 고파도,

누가 깨워도, 계절이 세 번쯤 바뀌어도 절대 깨지 않을 셈이었다. 질기고 고집스럽게

잠자면서 서영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있다면 경호를,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고 싶었다. 잠 속에서, 깊은 휴식 속에서.

 

  서영은 세 병째 맥주병을 따면서 복도를 울리는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술에 젖어

무거운 몸을 겨우 추스르며 걷는 소리였다. 그 사람일 것이다. 서영은 그가 저녁마다 술에 취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거나 소리로 짐작하곤 했다. 그 역시 맨정신으로

모텔 방에 혼자 있는 밤이면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손목이라도 그을 것 같아 두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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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보다 더 심하게 불규칙한 소리를 내던 걸음은 서영의 방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멎었다.

아마도 그는 문 앞에 서서 재킷과 바지 주머니를 뒤져가며 열쇠를 찾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면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들 것이다. 서영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컵에 새 술을 따랐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대신 비틀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 두드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 저기요..........."

 

  그가 이쪽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영의 방이 아니라 옆방 문인 것 같았다. 방문을 두드리는 사이,

많이 취한 발음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저기요, 문 좀 열어봐요."

 

  처음에 서영은 그 남자가 취한 상태로 주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나, 이 세상사람 아무나 붙잡고

신세타령을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한 번 " 저기요..........." 라고 말했을 때,

그가 특별히 자신을 지목해서 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불규칙하게 방문을 두드리면서,

불분명한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모든 소음을 들으면서 서영은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음이 세상의 바깥에 나앉은 것 같아 뛰어내리지 않아도

추락사할 것 같은 느낌, 가만히 있어도 산소 부족으로 죽을 것 같은 심정은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서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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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요........"

 

  서영이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동안 남자는 간헐적으로 방문을 두드렸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가 했다.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서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내 데스크에 연락해 그를 어떻게든 해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방문을 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남자에게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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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을 열었을 때 남자는 옆방 문에 기대 서 있었다. 한 손과 이마로 방문을 짚고 온몸의 체중을

문짝에 실은 채, 남은 한 손으로 불규칙하게 문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방문 열리는 소리에

서영 쪽으로 고개 돌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결 심하게 취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셔츠 앞섶은 풀어헤쳐지고, 핏발이 심하게 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런 모습인 채로 남자는

서영을 향해 걸어 왔다.

 

  " 우리, 얘기 좀 해요."

 

  비틀거리듯 걸어와 서영의 방문에 기대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방문을 장악하는 바람에

서영은 방문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방문을 잡은 듯하더니 이내 달려온 힘 그대로

방문 안으로 꼬꾸라져 들어갔다.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방 한가운데 쓰러지고 말았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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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 한동안 방문 밖에 서 있었다. 안내 데스크로 내려가 주인 사내를 불러 그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해야지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헐렁한 코드류이 바지에 풍성한 재킷을 입은 채

방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물체처럼 보였다. 함부로 부려 놓은 곡식 자루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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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 한 걸음 방으로 들어가 문간에 선 채 또 한동안 그를 바라 보았다. 고꾸라지듯 쓰러진

자세 그대로 그는 벌써 잠든 모양이었다.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가 방 가득 퍼지고, 숨결을 따라

술 냄새도 퍼져나갔다. 서영은 방으로 들어가 창을 조금 열어둔 후 마시던 술잔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바닥에 쓰러져 잠든 남자의 얼굴은 많이 상한 듯 보였다. 급하게 살이 내린 듯 볼이 홀쭉하고,

탄력 없는 살갗은 꺼칠했다. 찡그린 얼굴은 미간에 깊은 세로 주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사람처럼 잠 속에서조차 핏줄이 곤두서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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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 문득, 충동적으로 그를 두드려 깨워 방에서 쫒아내고 싶었다. 아니, 그를 흠씬 패주고

싶었다. 온몸이 녹작지근해지도록, 가슴이든 어깨든 어디든 손 닿는 대로 후려치고 싶었다.

구겨진 자루처럼 쓰러져 잠든 그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비쳐주고 있어서

어디든 몸을 숨기고 싶기도 했다. 옷장 속이거나 실내를 되비치는 거울 속이라도. 몸뚱이가

아주 작아져 세밀한 입자로 분해되어 흩어져버렸으면 싶었다.

 

  그 모든 충동과 분열되는 감정을 느끼며 서영은 술만 마시고 있었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겨울바람이 창을 흔들고 지나가고, 적막한 골목에서 이따금 자동차 경적이 들려왔다. 허허 벌판에

앉아 있거나 난파선을 타고 표류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대책 없는

또 한 사람의 동행이 있었다. 방바닥에 쓰러져 누운 그가 몸을 뒤척이더니 울음 뒤끝을 누지르는 듯

가슴을 흐득였다. 신음인 듯, 비명인 듯 짧은 의성어를 뱉은 후 다시 한 번 가슴을 떨었다.

서영은 하마터면 그에게 다가가 가슴을 다독여줄 뻔했다.

 

  " 우리, 얘기 좀 해요"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의 갈망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누군가와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많은 것들이 해결될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노도, 뼈가 비틀리는 듯한 배신감도, 살이 벌어지는 듯한 고통도 강도가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영에게는 아니었다.

 

 '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언 손으로 서로의 볼을 쓰다듬어봤자, 허기진

사람끼리 서로의 배를 쓰다듬어봤자, 피가 철 철 흐르는 사람끼리 서로의 상처를 문질러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기쁨과 기쁨은 만나서 두 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고통과 고통이

만나면 무한대로 폭발할 거에요. 사방 1킬로미터 이내의 사물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요.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요. 가까이 다가서지도 말아요.'

 

  서영은 의자에서 내려와 더 편안한 자세로 방바닥에 주저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매는

속눈썹이 짙고 선명한 게, 선이 고왔다. 눈매뿐 아니라 콧날도, 입술 선도 단정해 보였다.

그가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보았다. 얼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을 만큼

과도한 감정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그랬거나 자신이 그랬거나.

 

  서영은 그의 신발과 재킷을 벗겨 몸을 좀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딱딱한 방바닥이 배기지 않도록 등 밑에 이불을 깔아줄 수도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을 만들어서 그의 얼굴과 손을 닦아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서영이 가끔

경호에게 해주던 일이었다. 모로 누워 있던 사내가 문득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서영은 잠깐

놀랐다. 그는 몸을 뒤척이려다가 힘이 달리는지 도로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 수진아............."

 

  발음은 불분명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다음 흐드득 가슴을 떨었다.

꿈속에서 우는 걸까, 가슴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서영은 그의 얼굴에 오래도록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먹는 듯 입맛을 다셨다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코를 문질렀다가, 기어이 이빨을

가는 것까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잠든 얼굴에 그토록 다양한 표정이 어리는 줄 처음 알았다.

그는 아이처럼 보였다가, 노인처럼 보였다가, 분노한 청년처럼 보였다가 했다. 누군가가 잠든

모습을 보게 되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서영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가슴이 젖어오는 것 같았다. 내면 깊은 곳에서 울음이

올라올 것도 같았다. 경호의 사고 소식을 들은 후 전기가 공급되지 않은 가전제품처럼 잠을 잘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가슴속이 뻑뻑하게 메말라가는데, 한 번 울어주기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은데 단 한 번의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가슴이

젖어오면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서영은 그의 등 뒤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잠들고 싶었다. 잠들기 전이든 꿈속에서든

그처럼 가슴 흐득이며 울 수 있다면 더 좋을것이다. 일단 잠이 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세 계절쯤 흘러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지워진 기억 속에서 모든 걸 용서했다는

사실마저 잊을 때까지, 그때까지 잠들 것이다.

 

  서영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있다가는 진짜로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등 뒤에 쓰러져 누울 것 같았다. 겉옷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서기 전, 냉장고의 물을 꺼내

거푸 두 잔을 마셨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맡에 메모를 한 장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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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바다로 이어지는 강둑에 올라서니 강 건너 절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애는 바다 쪽에서

올라오는 빛을 받아 말갛게 씻은 듯 빛나고 있었다. 은을 녹여 부은 것처럼 눈이 얼얼하도록

은빛을 발산하기도 했다. 서영은 거대한 금속 방패처럼 보이는 단애를 오래도록 마주보고

서 있었다.

 

 

 

 

첨부파일 VTS_01_1.VOB_001603935.w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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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도 포장마차 씬 찍을때 참 맘이 아팠던 때라고 기억하더군요..

저 장면을 옮기면서... 어렴풋이 짐작되는 맘여서...

 

폭풍치는 검은 바다 한가운데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올수 없는 그 마음이란게....

 

참을 수 없는 광폭함이 온몸을 관통할거 같다는 생각이........

그 고통에 온몸을 갈기 갈기 찢고 싶은 충동이..들거 같기에....

 

출처 : 배 용 준 과 배 토 미 사
글쓴이 : 유니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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