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엔 언제나 힘겨웠던 내 삶, 버려진 우산처럼 난 항상, 추위와 고통 그 심한 모욕,
그 모든 걸 견디며 여러 번 이별하며, 진짜 사랑을 찾아 떠돌던 방랑자......."
소극장 무대 위에서는 헐렁한 힙합 바지를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쓴 가수가 랩 음악을 노래하고
있었다. 초록색과 푸른색이 섞인 조명이 천장에서 내려오면서 가수의 어깨며 머리에 닿아
사방으로 부서졌다.
조명은 포획하는 듯한 공격성과 더불어 부드러운 손길처럼 몸 이곳 저곳을 쓰다듬는 듯한
이미지도 표출하고 있었다. 한 가지 조명으로 상반된 두 가지 정서를 표현하는 무대를 인수는
유심히 보고 있었다. 광일의 입봉 작품이었다. 인수는 그가 보내준 조명 디자인 프로그램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
" 훌륭하다. 넌 잘해낼 수 있을 거야" 그 말만을 덧붙였다.
" 하지만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한 너, 너를 가슴에 새김으로써 난 다시 태어났어, 붉은빛으로 피어난
꽃으로..........."
광일의 능력은 인수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그에게는 빛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의 가볍고 거친 듯한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드럽고 두터운 빛으로 음악의 빈 곳을 채우고 있었다.
평소에 인수가 세밀하게 빛을 겹쳐서 역동적인 감각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면
광일의 빛은 두툼하면서 힘 있는 포용력 같은 게 있었다. 인수의 조명이 어둠을 가르며 솟구쳐
나가는 느낌이라면 광일의 조명은 어둠을 끌어안으며 유영하는 듯했다. 녀석이 저런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가 싶었다.
광일은 콘솔 박스 앞에 서서 음악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버튼을 조작하고 있었다.
인수는 광일에게 다가가 새삼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축하한다, 멋져!"
" 오셨어요? 잘 보시고 모니터 좀 해주세요."
광일은 예의 그 조심스럽고 배려하는 듯한 태도로 인수를 맞았다. 인수는 알았다고
말한 후 콘솔 박스 옆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전날 오후, 거의 보름 만에 집에 들어서면서 인수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말라 죽은 화초들이었다.
산소를 많이 만들어준다는 초록 식물, 인수가 이파리 하나하나를 닦아주었던 바로 그 식물이
누렇게 변한 이파리를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늘어진 이파리에 손을 대자 까칠한
감촉이 전해지면서 금방이라도 고스란히 부서져 내릴 듯했다. 인수는 일제히 말라버린
화초들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동안 외면해온 것, 차마 꺼내서 확인하지 못한 것,
그토록 미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이 눈앞에 명료한 형체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수진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의 신뢰를 짓밟고 인간으로서 배덕한 행위를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진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 삶 속에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와 관련된 삶을 다른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자유 의지에 의한 그녀의 선택 이었다.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다른 남자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결혼 생활을 보호하고 한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인수도 알고 있었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본성을 억압하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그 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행위도 우습다는 것을. 이왕 약속된 제도라면 되도록 지키는게 낫겠지만 어떤 불가항력이나
악덕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수는 집 안의 문을 모두 열어 공기를 바꾸고 시든 화분을 하나씩 쓰레기장으로 내어놓았다.
어떤 경계를 지난 것은 틀림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집 안을 정돈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계속 앞길을 두리번거리는 느낌이었다.
인수는 이제 수진의 행동보다, 그 행동을 규제하는 제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멈추지 않는 고집스럽고 불가항력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밤의 공원에서 자신의 손을 뿌리친 서영의 마음에 대해서도 짚어보았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서영의 볼을 감싸 쥐는 순간 자신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날 이후 인수는 어쩐 일인지 서영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녀가 거절한 것이
다만 손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존재 전체를 거부당한 듯 위축되었다. 아마도 수진의
일이, 수진에게서 치명적으로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피 흐르는 내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을 뿌리치고 떠난 서영이 남편의 병실 앞에 오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 상처가 다시
덧나는 것 같았다.
" 팀장님!"
광일은 여전히 콘솔 박스 앞에 선 채 춤을 추듯 팔을 뻗어 인수를 불렀다.
" 저 음악에 기본 색깔로 노랑이 좀 튀는 거 같지 않아요?"
음악이 높은 고비로 올라서자 광일의 동작이 더 커졌다. 그러고보니 음악이 바뀌어 있었다.
여가수가 등장해 느린 발라드를 부르는 중인데 음악의 톤이 다소 무거웠다. 아마도 광일은 음악의
어두운 정서를 보완하기 위해 일부러 노란색을 선택한 것 같았다.
" 아니야, 훌륭해."
인수는 의자에 앉은 채 상체를 일으켜 광일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 그래도 이따가 자세히 얘기해줘요."
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분간 일을 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 조명 디자인을 한다면 틀림없이 음울한 색조에 불안정한 터치를 가진 프로그램이 나올 게
뻔했다. 인수가 광일의 조명을 더 유심히 보기 위해 다시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데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기가 진동했다. 액정 화면에는 ' 한서영 ' 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다만 이름만 보았을 뿐인데 벌써 가슴이 내려앉았다.
공연장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음악이 먼저 서영에게 닿은 모양이었다.
" 음악 소리가 들리네요."
" 네, 공연장이에요. 리허설 중이고."
" 잘 계세요?"
" 네. 그쪽은요?"
인수는 전화의 위력을 새삼 알아차렸다. 전신음으로 듣는 목소리는 낯선 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했고
거리감만 한 그리움을 솟아나게 했다. 가슴에서 서걱거리던 서먹함 같은 것이 일시에 날아가고
안타까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서영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목소리에 유난히 정겨움이 묻어났다.
" 저, 지금 서울 가는 길이에요."
인수는 왜, 무슨 일로 오는지 묻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려 들면 또다시 거리감이 느껴지면서
지뢰밭에 들어선 기분이 될지도 몰랐다.
모든것을 덮어둔 채로 인수는 서영이 터미널에 도착할 예정 시간만 물었다.
그런 다음 광일에게 먼저 가겠다고 손짓한 후 곧바로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터미널에서 만난 서영은 지방 소도시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인수는 서영의
눈에 자신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곳에서는 늘 병원 냄새, 배우자의 그림자,
음울한 유적의 분위기가 서로의 등 뒤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병원이나 모텔 근처가 아니라
먼 바닷가나 강둑 위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달랐다. 늘 달고 다니던 그림자를 떼어놓고 온 듯, 존재 전체가 빛만으로
이루어진 듯 환하고 가벼웠다. 그곳에서 있었던 서먹했던 일도, 가슴에 남아 있는 서운한
감정도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일제히 날아갔다.
인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서영의 가방을 차에 싣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서영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 공원에서 인수의 손을 뿌리친 다음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인수는 유난히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정중함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얼마나 아득한지 서영은 몸이 굳어 인사를 받지 못했다.
그는 그날 점심을 먹자고 하지 않았고 저녁 시간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병실로 찾아와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다면서, 간병인이 있지만 그래도
환자를 좀 부탁한다고 말할 때는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 보였다.
인수가 떠난 그 하루 만에 서영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다.
감정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인수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가 텅 빈 것 같았다.
하루해가 끝도 없이 길었고, 몸이 마르는 것처럼 초조했다.
종일토록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마음이 황망하여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서영은 숙소를 나와 기어이 그 공원에 다시 가 보았다. 인수의 손길을 뿌리쳤던 바로 그곳에
서서 자신의 마음, 그 깊은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이 대체 왜 이러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서영은 그의 손길을 뿌리친 진짜 이유, 마음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마음을
냉정하게 살펴보았다. 그것은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식의 자책감 때문도 아니고,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경계심 때문도 아니었다.
서영이 인수의 손길을 뿌리친 진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에게로 끌려가는 인력이
너무 강해서, 그것이 마치 낭떠러지로 뛰어 내리는 일이거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일처럼
여겨졌다. 또한 실체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상의 시선에 대해서도 지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날 서영은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공원 가장자리까지 가보았다. 공원 가장자리는 암벽으로
되어 있고 암벽 너머는 허공이었다. 그러니까 서영은 깎아지른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셈이었다. 발밑은 서영이 늘 강둑에서 건너다보던 단애와 똑같은 지형이었고, 절벽은
고스란히 강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곳은 서영이 바라보곤 하던 강보다 상류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그곳에 서자 서영은 애착의 감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불과 얼마전만 해도 그 절벽에서
흰 꽃잎처럼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환영처럼 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생이거나 사람에 대한 애착의 감정 같은 것이 내면에서 출렁이며 몸을 마르게
하고 있었다. 서영은 암반 가장자리에서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거대한 암반 한쪽에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그 바위에 선사시대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특히 다산을 기원하는 작은 구멍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여성의 생식기를 본뜬 모양이라는 설명이었다. 서영은 거대한 암반 위를 거닐며
용 머리나 호랑이처럼 보이는 바위, 둥글게 패인 구멍과 작은 홈들을 살펴보았다.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5천 년 전에 새겨진 기호라는 얘기였다.
암반 위에는 아치형 홈이 파인 바위도 있었는데 그것은 동해 용왕이 된 신라 문무왕이
관동 지방을 시찰하러 올 때 지나간 흔적이라는 설명이었다. 서영은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 그렇네요. 오래된 사물에는 영혼이 있네요. 그런데 이분, 경주 앞바다에 잠드신 분이
참 멀리까지 오셨네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서영은 잠깐 몸이 굳었다.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심히 뱉은 그 말은 틀림없이 인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얼마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말았는지를 깨달으며 서영은 암반 위에 오래 서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생이란 5천 년의 시간에 비하면 눈꺼풀을 열었다 닫는 만큼도
안 되는 시간인데........
무한의 선으로 이루어진 시간 위에 작디작은 점으로 존재하는 인간인데.........
서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 다음 서울행을 결심했다.
22너는(PerformedByLoveholic,FromTheConcert),(ⅡStoryFrom_AprilSnow).wma
음악 파일은 외출 ost 전체를 다운 받게 해주신..
yuri0902 님에게 감사 드리며~~
덕분에 그전에 올린 것들...
음악파일 몇개를 수정했어요..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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