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터미널을 빠져나온 인수는 딱히 어떤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운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호를 따라 무심히 차를 달리는 듯한 그의 옆에서 서영도 어디로 가는 참이냐고
묻지 않았다.
" 오늘 후배가 조명 오퍼레이터로 입봉하는 무대가 있어요. 그거 좀 봐주려고..........."
인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서울행에 대해 변명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저는 내일 친정 쪽에 집안 행사가 있어요. 거기 참석하려고요........"
서영은 자신이 거짓말을 좀더 능숙하게 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막연히 집안 행사라고 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말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싶었지만 그 어떤 일이 금방
떠올라주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인수는 라디오를 틀었다가 끄고, 창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는 도로에는 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막연히 달릴 수 없는
큰 네거리에 도착해 어떤 방향으로든 길을 정해야 했을 때 인수가 물었다.
" 좀 걸을래요?"
서영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 시간 동안 버스에 앉아 있어서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어디서든 몸을 펴고 팔다리를 움직였으면 싶었다. 인수는 능숙하게 자동차의 방향을 돌리더니
유턴을 하고, 좌회전을 하고, 낮은 지하도를 지나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렸을 때 서영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화려한 불빛들로 장식되어 전위 예술품처럼
빛나는 한강 다리들이었다. 다리 난간에 설치되어 교각을 비추는 불빛들이 강물 속으로 길게
반사되어 강물 안에도 푸른빛 기둥들이 도열해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서 잠깐
보던 때와는 달리 낮은 곳에 멈춰 서서 올려다보는 느낌은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 저 다리 불빛들도 조명 예술에 속하는 건가요?"
서영은 양손을 들어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교각을 동시에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 [인형의 집]의 로라를 떠올렸다. 남편이 바뀔 때마다 남편이 일하는 분야에 전문가가
되곤 했던 여성.
서영은 그동안 별로 유심히 보지 않았던 다리 조명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신기했다.
" 그런가 봅니다."
인수는 연극적으로 과장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설명을 덧붙였다. 서울시에 도시 조경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서 이런 사업을 펼친다는 것이다. 한강 다리뿐 아니라 시청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공공건물에 조명 장치를 해서 밤이면 웅장하고 신비롭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강 다리는 매년 네다섯 개를 선정해서 조명 디자인을 공모하여 야간 조명을 설치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리 하나 하나를 보면 아름답고 완결성이 있는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거나,
다른 다리들과 통일성을 갖는 문제는 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는 것이다.
" 전체적으로 푸른 톤을 띠는 저 다리는 시민들의 감정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살 충동을 일으킨다는 비난도 있죠."
인수가 손을 들어 왼쪽에 보이는 다리를 가리켰다. 강물 속을 깊이 비추는 푸른색 빛기둥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는 했다. 그러나 서영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평화거나 충만함처럼 보일 뿐이었다.
서영은 인수와 함께 자살 충동을 일으킨다는 그 다리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서영은
이따금 인수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인수도 서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실없이, 혹은 내밀한 마음을 주고받듯이 웃음을 나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다리는 푸른색뿐 아니라 초록색과 흰빛이 적절히 조화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 빛을 받는 인수의 모습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빛이 강물을 쓰다듬고 강물과 교감을
주고받는 광경을 다시 인수가 보고 있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 충만, 정화의 이미지 같은 것이 그 위에 어려
있었다.
" 저기요.......... "
서영은 자기도 모르게 인수를 부르고 말았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내면에서 끓어올랐다.
그를 다시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로 알게 된
조명 디자인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신기한지......... 그런 얘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 이렇게 강가에 서 있으니 모든 인류 문명이 강가에서 꽃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서영은 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가는 것을 들었다.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의 귀로 들어도 생뚱맞기가
이를 데 없어 어둠 속에서조차 얼굴이 붉어졌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인수가
웃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수는 서영의 말을 깊이 생각하는 듯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 너무 멀리 왔죠? 그만 돌아갈까요?"
서영은 인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멀리 또 다른
디자인의 불빛 옷을 입은 한강 다리가 보였다. 교각은 노란색, 상판은 푸른색, 가로등은 붉은색
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리에 장식된 삼원색은 물속 깊이 비치면서 서로 어우러지고 번지고
스며들어 신비한 색감의 빛 덩어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보다 다채롭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빛보다 더 풍성해 보였다. 서영은 세상의
모든 빛들이 다 섞여 있는 그 물길 속으로 성큼 뛰어들고 싶었다.
" 그거 알아요? 음계가 일곱 가지인 것처럼 프리즘을 통과한 빛도 일곱 가지 색깔이라는 거."
인수는 서영과 보조를 맞추어 걸으며 걸음과 같은 속도로 이야기 했다. 서영은 인수의 말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 도레미파솔라시 '에 대응하는 ' 빨주노초파남도.'
그러고 보니 미는 노란색 같고, 솔은 파란색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수는 콘서트 조명 오퍼레이터는
음악을 들을 때 감각적으로 빛을 느낀다고 말했다. 음악을 듣는 순간 직관적으로 눈앞에 테마 색깔이
떠오르고, 그 다음에 빛의 질감이나 역동성 같은 디자인이 뒤따라 연상된다고 했다. 반대로 특정한
빛을 볼 때 음악이 떠오르는 일도 있다고 했다.
" 이를테면 좀 전에 봤던 다리 조명이 발라드 멜로디를 연상시킨다면, 저 앞에 있는 다리 조명은
댄스 음악의 리듬감을 느끼게 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행복하거나 충만하다는 느낌이 불빛처럼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어둠이 더 짙어져도 내면의 그 불빛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라면 이 강변에서 밤을 새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서영에게 인수가 한 옥타브쯤 높아진 목소리로 제안했다.
" 날씨도 쌀쌀한데, 우리 달릴까요?"
서영은 대답을 기다리듯 서 있는 인수를 두고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수가 큰 소리로
웃으며 뒤따라 달렸다. 인수는 금세 서영을 따라잡더니 서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두 사람은 강바람을 맞으며 등줄기에서 땀이 배어날 때까지 달렸다.
서영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로부터, 병실에 누워 있는 각자의 배우자로부터,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되는
타인들로부터 달아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금기를 향해 또 한 걸음 내디디고 있는 자신들로부터 달아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먼저 달음질을 멈춘 사람은 서영이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면서, 여전히 숨을 고르고 있는
인수의 두 손을 잡았다. 인수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전에 그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볼을 감싸 쥐도록 했다. 인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문득, 더 깊이 서영을 바라보더니 온몸으로 서영을 안았다.
열기, 체취, 가쁜 숨결들이 허공에서 엉기고, 밀착된 몸과 몸이 빛처럼 서로 스며들었다.
서로 다른 빛이 한데 어우러져 제 3의 색을 만들어내듯, 그 순간 서영은 인수와 몸이 합쳐져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잠시 후 인수는 고개를 들어 서영을 바라보더니 서영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서영은 인수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겹쳐졌을 때 얼음과자를 한입 베어 문 것 같았다.
알싸하게 차가우면서, 달콤한 맛과 화사한 향기가 났다.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따라 전류처럼
흘러 내렸다. 그 차가운 기운에 몸을 맡긴 채 서영은 눈을 감았다.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빙하 계곡을 유영하고 있었다. 눈앞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낭떠러지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한 5천만 년쯤 후 한 고고학자가 얼음 속에서 미라가 된 키스하는 남녀를 찾아낸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일일 것 같았다.
" 괜찮아요?"
서영의 입에서 입을 뗀 후에도 인수는 오래도록 서영을 안은 채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달콤한 태도를 가진 사람일 줄 몰랐다. 그의 눈빛이 몸 전체를 빨아들일 듯
강렬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서영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화해와, 서로의
마음에 대한 확인과, 내면에서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충만함...........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인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서영을 집까지 태워다준 후, 집 앞에 자동차를 세운 채
잠시 머뭇거렸다. 뒷좌석에서 서영의 가방을 집어 건네준 후에도 정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마도 서영의 제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가서 차 한잔할래요? 출출한데 라면이라도 먹고 갈래요? 동서고금의 연인들 사이에
전해져오는 그 제안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영은 아직 아니었다. 아직은 거기까지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를 만날 때마다 의식이 확장되고, 감성이 열리고, 몸의 감각들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무언의 제안과 무언의 거절이 허공을 오가고, 그것이 다시 두 사람에게 내려앉았다.
서영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로는 저릿한 전율이, 가슴에도 동심원의 파문이 지나갔다.
서영이 그 긴장을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을 때 인수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 어제 집에 들어갔더니 화초들이 다 죽어 있었어요."
인수가 한 발 물러서는 것 같아 서영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집에 들어가 그 비슷한 것을 보더라도 놀라지 마시라고요."
서영은 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차에서 내렸다. 자동차의 미등이 멀어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영은 그쪽으로 시선을 두고 서 있었다.
그들도 이랬을까, 처음에는 이렇게 망설이면서, 사소한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면서, 그 금기의
장벽들을 넘어갔을까.
서영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14'난괜찮아요[1]....'(ⅡStoryFrom_AprilSnow).wma
그들의 또 다른 사랑이 서서히...
그들 곁으로 다가 오고 있네요....
아니.....벌써....
인수와 서영에겐... 이미 와 있는 거겠죠......
이것을... 또 하나의 불륜이라 칭해야 하는건지......
아님.... 그들만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여겨야 옳은건지........
이런저런 세상 잣대는 다 버리고......
그저 인수와 서영만 바라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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