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스크랩] 외출............소설로 보다............. 그 여덟번째 이야기..

중독1106 2008. 3. 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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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창 밖으로는 메마르고 적막한 겨울 풍경들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앙상한 손을 들어 허공을 긁는 가로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려 도로를 덮을 것 같은

야산의 깎인 단면, 다시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어 보이는 불모의 논바닥...........

인수는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들어와 몸 안에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아니, 내면이 이미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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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자리에 앉은 서영도 그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아주 중요한

임무이기라도 한 듯, 차창 밖으로 시선을 밀어내고 있었다. 밭둑을 태워 들어가는 쥐불, 시골 소읍의

무뚝뚝한 관공서, 머리에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뒷짐을 진 채 걷는 노인......... 시선이 닿는 어느 곳에든

두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 있었다.

텅 비고, 황량하고, 고단한 풍경들. 가만히 있어도 창밖 풍경에 감염 될 것 같았고, 서로 시선이

마주치면 내면의 황량함이 증폭될 것 같았다.

 

  보험사 직원은 끝내 트럭 기사의 사망 소식을 가지고 왔다. 피해자가 워낙 젊어서 유가족과 협의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조문을 다녀오는 게 좋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 아직 운전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두 분 모두 다녀오십시오."
 

  만약의 경우란 유가족과 보상금 문제를 합의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가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당하더라도 그것이 나중을

위해 더 낫다는 설명이었다. 인수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전에 산 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그 이기성에 잠시 진저리쳤고, 그럼에도 그 일을 직접 해내야 한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하지만 진저리나 낙담조차 실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구정물에 구정물을

타는 것 같은 상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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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의 집은 하필이면 땅끝마을이라고 했다. 인수는 아침 일찍 출발하면서 지도를 펼쳐

도로를 확인했다. 동해안을 따라 죽 내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남해안을 따라 가는

길이었다. 내륙을 가로지르는 코스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쪽으로는 도로가 없었다. 그래도 넉넉잡고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서영은 차에 탈 때 한 번 인사를 나눈 후 별다른 말이 없었다.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하고

차를 마실 때에도 그랬고, 차창 밖으로 장엄한 산이,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인수는 침묵이 어색해서 잠깐 음악을 틀었으나 이내 끄고 말았다. 차에 있는 음악들은 콘서트 조명

설계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받은 데모 테이프여서 대체로 리듬감이 강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라디오를 켰다가 그것도 금방 끄고 말았다. 라디오는 강요하는 듯한 말투로 현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면서 너무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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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고요함이 더 나았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 겨울바람이 차체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도 괜찮았다.

낯선 사람과 침묵 속에 앉아 있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는 점도 다행스러웠다. 인수는 그 이유가

'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 라는 메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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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인수는 술에 취해 서영의 방문을 두드렸던 것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기억은

이튿날 정오쯤 잠에서 깬 장면으로 건너뛰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인수는 어떤 몰골을 하고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알아차리면서 참혹했다. 이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구나 싶었다.

기억이 비워버린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을지 두려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고통스럽고 세상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듯한 모멸감에 지배당하고 있었으니..........

어떤 폭력적인 언행을 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구두를 신고 겉옷까지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큰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방 주인을 황당하게, 분노하게 했을 것은 틀림없었다. 인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오다가

문간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방 안에 무엇을 떨구거나 헝클어놓지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잠시 방 안을 돌아보았다. 방 한가운데, 자신이 누워 있던 머리맡쯤에 흰 종이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인수는 신발을 신은 채 걸음을 커다랗게 디뎌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메모를 보는 순간 긴장되어 있던 몸이 일시에 이완되었다. 단 한 줄의 문장이 그토록 많은 것을

일러줄 줄은 몰랐다. 그 문장은 인수가 치명적인 결례를 범하지는 않았음을 일러주었고,

여자가 크게 화나지는 않았다느 사실을 말해주었다. 무례에 대해 양해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잠 깬 후 인수의 상태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까지 들어 있었다. 인수는 작은 냉장고를 한번

바라본 다음 그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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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들어가 정신을 차리고 외출 준비를 한 다음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었지만 수진을 보러 들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수진을 볼 자신이 없었다. 모든 곳에서

보이는 그 동영상이 수진의 산소호흡기 위에서, 주사병 표면에서 보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대신 인수는 중환자실 창을 통해 서영의 모습을 찾았다. 경호의 침대 옆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병원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복도 끝 커피 자동판매기 옆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한 순간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인수는 잠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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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인수의 기척에 서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덤덤한 표정, 지나치게 덤덤해서 자칫 냉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인수가 "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자 서영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인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창밖으로 고개 돌렸다. 완전한 타인의 눈빛이었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인수는 그녀의 등 뒤에서 다른 반응을 기다리듯 잠시 서 있었다. 몸을 돌리기 직전,

다시 한 번 " 고마웠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서영은 미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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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서영은 그때처럼 미동이 없었다. 한 번 더 휴게소에서 쉬고, 산보다는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풍경 속을 오래 달리고, 보리가 파릇하게 돋은 벌판을 지나자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것 같았다. 남쪽 끝이어서일까, 벌써 꽃이 핀 매화 농장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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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는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도로 표지판을 따라 가니 크지 않은 마을이 있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조등이 걸려 있었다. 조등을 따라 가니 경운기 한 대 지나다닐 법한 농로 끝에 전형적인 시골 농가가

있었다. 도로 끝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을 때 서영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주저하는 듯한, 혹은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처럼 보였다.

 

  " 그냥 여기 계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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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이 대답이 없자 인수는 상가를 향해 벌써 걸음을 내디뎠다. 이내 서영이 뒤따라와 인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상가로 들어서자 대문 오른쪽에 세워진 여덟 폭짜리 병풍 양 옆에는

감나무 한 그루와 화강암으로 보이는 큰 돌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객사한 가족이어서 대문 안까지는

들여도 방 안으로는 모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병풍 옆으로 설치된 천막 안에는 예닐곱명쯤 되어

보이는 문상객이 음식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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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가 툇마루에 놓인 부조함에 봉투를 넣었다. 서영도 인수를

뒤따라가 똑같이 했다. 마루 끝에 넋을 놓은 듯 앉아 있던 노인이 무겁게 몸을 일으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인수와 서영은 동시에 노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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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기 친구유?"

 

  노인은 가까이 다가와 손이라도 잡을 듯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열린 방문 안쪽으로는

상복을 입은 여자가 아이를 업고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인수는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신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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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송합니다. 사고 낸 사람 배우잡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노인은 내밀었던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도로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뻑뻑하게 쉰 듯 힘없는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방 안에 있던 여자가 마루로 나서며 " 어머니!" 하고 다급하게 불렀다.

부엌에서 나오던 또 다른 여자는 의혹의 눈빛으로 인수와 서영을 향해 누구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번에는 서영이 대답했다.

 

  " 죄송합니다. 사고 낸 사람 배우잡니다."

 

  여자는 들고 있던 쟁반을 팽개치더니 그대로 서영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부터 틀어쥐었다.

순식간에, 누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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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동생 살려내, 내 동생..........."

 

  서영은 여자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잡힌 채, 머리뿐 아니라 몸 전체가 흔들리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여자에게 존재 전체를 내맡긴 태도였다. 그래요, 나를 좀 어떻게 해주세요. 나를

벌하든지, 모욕 하든지, 파괴하든지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무엇을 하든 제대로 해줘요.

제대로 파괴하고 완벽하게 모욕해봐요. 서영은 온몸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둔 채 눈을 감고

그렇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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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는 서영을 보호하려 했다. 최소한 여자의 손길에서 서영의 머리카락이라도 떼어놓으려 했다.

인수가 두 여자를 향해 팔을 뻗을 때, 바로 그 순간 대문간 천막 안에 있던 사내가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 그는 내달리던 기세 그대로 인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를 날렸다. 몇 번의

주먹질이 인수의 가슴이나 어깨쯤에 와 닿았다.

 

  사내의 공격을 받으면서야 인수는 서영이 왜 눈을 감은 채 그 폭력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었는지 이해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주먹과 더 세찬 발길질이 온다 해도

이미 내면에서 타오르고 있는 그 뜨거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주먹과 발길질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동안 묘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통도 죄의식도

탕감하듯 엷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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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란이 커지자 사람들이 다가와 엉긴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사내는 끌려가면서도 인수를 향해

헛발길질을 날렸다. 인수와 서영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매만지지도 않은 채 다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 어서들 가요."

 

  노인은 힘없는 팔을 들어 인수와 서영에게 손짓했으나 두 사람은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찬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자 어디선가 긴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천막으로

돌아간 사내는 여전히 두 사람을 향해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노인은 한 걸음 더 인수와 서영에게 다가와 내몰듯이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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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서들 가슈, 어서들 좀 가..........."

 

  목소리가 거의 애원조에 가까웠다. 인수와 서영은 그제야 노인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상가를 나섰다. 농수로를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전선에 걸린 연이 연신 꼬리를 흔들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출처 : 배 용 준 과 배 토 미 사
글쓴이 : 유니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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